[뉴스토마토 한동인 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 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전승절) 80주년' 열병식 참석을 계기로 다자 외교 무대에 데뷔하면서 중국과 러시아라는 '뒷배'를 공고히 했습니다. 특히 톈안먼(천안문) 망루에 북·중·러 정상이 나란히 선 장면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중국과 러시아가 사실상 '묵인'한 건데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한반도 문제의 '피스 메이커'(평화 중재자)로 앞세워 '페이스 메이커'(보조자) 역할을 하려던 이재명 대통령의 구상에도 '딜레마'가 생겼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북·미 직거래에 따른 한국 패싱을 비롯해 남북 핫라인 단절, '탈 안미경중' 이후 대중 관계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한·미·일' 대 '북·중·러' 결속 심화
5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과 러시아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3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각각 양자 회담을 가졌습니다.
이목을 끈 북·중·러 3국 정상의 공동 회담은 불발됐지만, 양자 간의 회담을 통해 소통이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은 이번 전승절을 통해 다자 외교 무대에 데뷔전을 치렀는데, 사실상 중·러와의 관계를 한 단계 끌어올렸습니다.
특히 관계가 소원해졌던 중국과의 대화를 통해 국제·지역적 전략적 협력 강화에 뜻을 모았습니다.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은 비공개 논의로 진행됐지만 군사·경제 협력을 논의한 것으로 관측됩니다. 코로나19 이후 더욱 고립된 북한이 중·러를 통해 국제사회에 화려하게 등장한 셈입니다.
2020년 6월30일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에서 회담하는 김정은 국방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모습. (사진=뉴시스)
①북·미 직거래
이번 전승절은 이재명 대통령의 방일·방미 순방에 따라 한·미·일 협력이 강화된 시점 이후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대결 구도가 고착화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데요.
이 대통령은 지난달 25일(현지시간)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과 직거래를 원하는 북한, 북·미 간의 대화에만 집중하려는 미국 사이에서 '페이스 메이커'라는 보조자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당시 이를 놓고 북·미 대화에서의 '코리아 패싱'을 사전 방지했다는 평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북·중·러가 전승절을 계기로 '반서방'·'반미' 연대 결속을 다지면서 상황은 한층 복잡해졌습니다. 북한이 이번 전승절에서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핵무기 보유를 '묵인'받은 영향입니다.
실제로 북·중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생략됐습니다. 북·중 양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논의했지만, 서로의 협력 문제만을 다뤘습니다. 결국 북한이 핵 무기 보유를 고리로 대미 협상을 고려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김 위원장은 향후 북·미 간의 거래에서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대신 '핵 군축 협상'에 나서려는 전략을 펼칠 가능성이 큽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북한에 대해 '뉴클리어 파워'(핵보유국)라고 언급했던 점을 고려하면 '코리아 패싱'이 현실화된 채 핵 군축 협상에 대한 북·미 직거래가 우려됩니다.
2020년 6월17일 조선중앙TV가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장면을 17일 보도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②남북 핫라인 단절
이재명정부는 출범 직후 대북 전단 살포를 규제하고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는 등 긴장 완화 조치를 통해 남북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이 대통령은 '제80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현재 북측의 체제를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일체의 적대행위를 할 뜻도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유화책에도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지난달 "잔꾀는 허망한 '개꿈'에 불과하며 전혀 우리의 관심을 사지 못한다"고 평가절하했습니다.
한반도 문제에 있어 코리아 패싱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남북 관계 개선에 따른 '직접 당사자'로서의 역할입니다. 때문에 남북 소통 채널인 핫라인의 복구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남북 소통 채널의 경우 정상 간 핫라인,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군사 통신선 등이 존재하는데요. 북한은 2020년 6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고, 정상 간 핫라인도 단절했습니다. 결국 남북 핫라인 복원이 북한과의 소통은 물론 한반도 문제 해결의 첫발인 셈입니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③탈 안미경중
이 대통령은 방미 과정에서 "과거에 한국은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태도를 취한 게 사실이지만 이제 과거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기존의 안미경중 노선의 종식을 언급한 겁니다.
이는 한·미·일 협력을 본격화해, 한반도 문제와 '실용 외교'를 풀어 나가겠다는 전략입니다. 하지만 한반도 문제가 남·북·미를 넘어 남·북·미·중으로 확대하면서 '딜레마'가 불가피합니다.
미·중 사이의 전략적 공간이 좁아진 데다, 중국을 통한 북한 문제 해결도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중국은 그간 한반도 문제에 있어 '원칙론'을 내세운 바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비핵화 △대화와 협상을 통한 자주적 해결이 3대 원칙인데요. 여기서 비핵화 부분이 생략된 것은 향후 중국의 입장 변화를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이 대통령은 오는 23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열리는 제80차 유엔총회에 참석하는데, 이때 한·미·일 정상 간 회동도 예상됩니다. 한반도 문제에 있어 한·미·일 대 북·중·러의 구도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 정부로서는 10월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미·중의 중재자 역할의 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옵니다.
한동인 기자 bbha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