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문득 찾아온 꽃샘추위의 매서움을 뒤로하고 소·대한을 앞둔 12월의 겨울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12월은 우리나라 겨울의 중심 달로 인식됩니다. 한겨울을 대표하는 '동지섣달(동짓달과 섣달)'의 시작도 12월부터인 걸 감안하면 가장 낮은 기온, 추운 시기가 오고 있음을 알죠.
겨울의 중심 달에서 내년을 기다리는 마음은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합니다. 얼어붙은 대지 아래에서도 흐르는 생명력이라면 모두가 느끼는 기복일 겁니다. 2026년 인류사의 경제도 계절의 경계선에 서 있는 듯합니다. 팬데믹의 기나긴 터널을 지나 인공지능(AI)이라는 빛을 향해가고 있지만 '자국우선주의'의 길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년 세계 경제의 가장 큰 변수는 전 세계적인 공급망 분절과 경제 비효율을 고착화하는 독소가 작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의 실효관세율이 과거 2.5% 수준에서 17%까지 급등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일 겁니다. 글로벌 교역의 지형을 뒤흔드는 독소 중 독소죠. 전문가들은 내년 미국 경제 전망에 대한 평가로 '견조한 성장'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2% 이상의 성장세가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3일 서울 영등포구 한강변에 고드름이 얼어 있다. (사진=뉴시스)
감세와 재정 지출, AI 투자 기반의 결과물로 축약됩니다. 반면 독일, 일본, 중국 등 주요 교역 국들로서는 관세 부담과 내수 부진이라는 이중고를 풀어야 할 고민에 빠져있죠. 다시 말하면 가장 큰 시장인 '미 성장'에도 한국 경제는 가파른 문턱과 활력을 잃어갈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했다는 뜻입니다.
2026년을 앞둔 한국 경제는 '위기'라 부르기엔 다소 과장적이고 '회복'이라 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연구기관들은 내년 세계 경제가 3% 안팎의 성장을 이어갈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지만 실상은 충격을 흡수하며 버티는 성장에 가깝습니다.
한국 경제가 겪을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죠. 겉으론 평온하게 얼어붙은 강물일지라도 그 두꺼운 얼음장 밑에서 필사적인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물고기와 같을 겁니다. 2026년 한국 경제의 지표는 3.0%라는 세계 경제의 완만한 회복세와 대비해 더욱 시리고 아프게 다가올지 모릅니다. 얼음을 깨고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 경제의 실핏줄인 '서민의 삶'과 '일자리'가 괴사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한 경제학자의 통렬한 지적처럼, 소득을 가중치로 둔 취업자 1인당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2020년 이후 마이너스 0.8%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우리가 '성장'이라 부르는 숫자의 실상이 저소득 일자리의 양적 팽창에 가려진 '생산성의 몰락'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순 없습니다.
최근 고용이 늘고 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고용이 만들어내는 소득과 생산성은 전혀 다른 얘기죠. 낮은 임금, 단시간, 공공·돌봄·단순 서비스 중심의 일자리 증가 등 '숫자상 고용'과 '경제적 고용' 사이의 간극은 급격히 벌어지고 있으니깐요.
지난달 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네거리에서 직장인들이 출근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소위 시중에 돈은 많은데, 돈이 안 돈다는 얘기를 합니다. 우리나라 화폐의 유통 속도는 올해 3분기 0.589, 0.6선이 붕괴되며 0.5대에 진입했습니다. 반면 일본은 코로나 이후 0.46까지 추락했던 화폐 유통 속도가 0.55 수준으로 회복세를 달리고 있습니다. 일본보다 더 더딘 회전 속도, 왜일까요. 가계에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30년간 GDP 대비 가계소비 비중을 보면, 일본은 약 54%를 유지해왔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한국은 50% 붕괴 후 45%대까지 OECD 최하위권을 달리고 있습니다. 즉, 한국 경제의 충격을 지난 30년 동안 가계가 떠맡아왔다는 방증입니다. 정체된 시장소득과 사회소득은 더 취약한 구조로 빠져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외환 공포는 어떨까요. 환율 상승, 재정 적자, 국가채무 증가로 자극받고 있는 현 외환시장을 보면,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1997년식 외환위기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환율이 급등했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 외환보유액은 200억 달러 증가했습니다. 외환 유동성 위기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문제의 원인 중 하나로 외환시장 미개입을 꼽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기준을 과도하게 준수하며 스스로를 옥죄는 식입니다. 예컨대 싱가포르는 환율 안정화를 위해 GDP 대비 평균 12% 이상의 외환시장 개입에 나섭니다. 미 환율보고서 기준을 수차례 위반했지만 물가 안정이라는 통화정책 논리로 밀고 가는 식이죠. 커지는 환율 변동성은 수입물가를 밀어올리고 가계 실질소득을 깎기 때문입니다.
가계가 경제의 중심일지, 아니면 끝까지 완충재로 남길지 이번 정부는 고민해야 합니다. 경제의 맥박이 뛰지 않는 시대, 회복이 아닌 방향의 문제라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지난 12일 서울 중구 서울지하철 1호선 서울역에서 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