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웅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
장면 1
박(00) 주무관은 떨리는 손으로 과장에게 보고서를 내밀었다. 각종 데이터와 사례들을 찾아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보고서였다. 과장은 보고서를 받아 든 지 딱 10초 만에 이렇게 말했다. "박 주무관, 보고서 형식이 이게 뭔가? 보고서에 들어갈 내용만 적는다고 다가 아니야.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보기 좋은 보고서가 내용도 좋은 거야. 인재개발원에서 이런 것도 안 가르치나? 용지 여백도 안 맞고, 자간이랑 줄 간격도 엉망이네. 다시 해 와요."
어제 같은 경우가 딱 그랬다. 과장은 노안이 왔다며 보고서의 글자를 평소보다 키우고 줄 간격은 넓혀서 가져오라 하고, 국장은 종이를 아껴서 헐벗은 지구를 지켜줘야 한다면서 전체 분량 두 쪽을 넘기지 말라 하고.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난감했던 박 주무관은 고민 끝에 보고서를 두 가지 버전으로 출력해 가져갔다. (『90년생 공무원이 왔다』, 행정안전부 2020년 11월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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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문화가 심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내려온 차트 문화, 차트를 얼마나 잘 꾸미느냐가 이게 일종의 승진의 기회가 되기도 했던 관행이 전 부처 전체 말단 지방까지 뿌리를 내렸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한 전자문서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서 보고서를 과도하게 꾸미느라 필요 없는 노동을 낳았습니다. 아래아한글은 이런 공직문화를 겨냥해서 과도한 편집기능을 집어넣었습니다. AI(인공지능)가 못 읽습니다. 대통령이 시작한 일이라 대통령님이 풀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전 지휘급 공무원들에게 보기 좋은 문서를 요구하지 말고, AI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보고서에 장차관들도 적응을 해라 지시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 2025년 12월 대통령 보고)
『90년생 공무원이 왔다』는 2020년 말 행안부가 야심 차게 내놓은 책이다. 500여명의 공무원들이 범정부 네트워크 '정부혁신 어벤져스'를 구성해 정부 혁신 방안을 논의했고, 여기서 일한 90년대생 57명이 이 책을 썼다. 당시 진영 장관은 서문에서 '이런 목소리를 포함해 정부 혁신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했고, 이듬해 2월 새로 취임한 전해철 장관은 온라인으로 저자들과 만나 진솔한 생각을 나눴다.
그리고 5년이 지난 2025년말 행안부 장관은 "컴퓨터를 이용한 전자문서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서 보고서를 과도하게 꾸미느라 필요 없는 노동을 낳았습니다"고 얘기한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래아한글의 과도한 편집 기능이란 자간(글자 사이 간격 조절), 행간(행과 행 사이 간격 조절), 장평(글자의 높이와 넓이 조절), 표안의 표 등을 말한다. 기실 이런 것들은 문서 작성이 아니라 탁상 출판(DTP, Desk Top Publishing) 기능이다.
문서를 만들 때 쓰라고 만든 기능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에 과도한 의전, 차트 문화가 겹치며 대참사를 낳았다. 지금까지 정부가 만든 모든 문서를 컴퓨터가 읽지 못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공무원들이 그 귀한 시간의 태반을 '가짜 노동'에 빼앗기고 있고, 젊은 공무원들이 '내가 이러려고 고시를 쳤나' 매일 좌절하며 전직을 고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장 찍는 로봇을 만들어선 안 된다
일본에는 인장 찍는 로봇이 있다. 자동 날인 로봇을 개발한 히타치패키털 측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 대신 로봇이 서류 뭉치를 분류해 도장을 찍으면 시간을 절약하는 효과가 있고, 이는 사실상 '서류를 전자화'하는 것과 같다."
AI는 많은 것을 자동화해줄 수 있다. 그러나 자동화 이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없애는 것이다. 과도한 문서 꾸미기, '가짜 노동'을 없애지 않고 AI를 도입하는 건 말하자면 인감 찍는 로봇을 만드는 것과 같다.
'과도한 꾸미기'를 없애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젊은 공무원들더러 '과도한 꾸미기'에 속하는 일들 리스트를 만들게 한 다음(이틀이면 만들 수 있다), 이 일들을 단호히 금하고, 대통령부터 장관까지 딱 1년을 과도하리만큼 감시하면 된다.
더 나은 방법이 있다. 클라우드 기반으로 협업을 하는 것이다. 애초에 과도한 꾸미기가 불가능한 문서 작성 기능을 주고, 모든 문서 작업이 클라우드에서 이뤄지게 하는 것이다. 감시를 애초에 할 필요가 없고, 작성 중인 것들을 포함해 모든 문서가 고스란히 클라우드에 남는다.
하지 않아도 될 일들, '가짜 노동'들을 없앤 다음에라야 진짜 자동화를 할 수 있다. 이제 와서 인장 찍는 로봇을 만들 순 없지 않은가!
박태웅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