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자 차원에서 2025년 정세의 상대적 수혜자는 북한이었다."
통일연구원 통일정책연구실 선임연구위원인 정성윤 박사는 지난 12일에 낸 '북핵 정세 평가와 2026년 전망 보고서'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북한은 대미·대남 전략에서 핵을 전면에 내세우는 태도를 유지했다. 여기에 북·중·러 연대를 활용했다"며 "그 결과 북한은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모두의 전략적 관심을 끌어당겼다"는 것이다. 전문가마다 조금씩 표현을 다르게 할 수는 있겠으나, 북한이 2025년에 국제적 주목도를 획기적으로 높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지난 9월3일 중국이 베이징 톈안먼(천안문)에서 개최한 전승절 80주년 무대는 그 정점이라 할 만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북한 최고지도자로서는 요시프 티토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장례식 이후 45년 만에 다자외교 무대에 재등장했다. 그는 러시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26개국 정상과 대표단이 참여한 대형 국제행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가운데 두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동렬로 등장해,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9월 3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얘기하며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이 열리는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도착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반면,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 비교적 낮은 관심을 보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김정은에 대한 잦은 언급과는 달리 트럼프 2기에서 북핵 문제의 우선순위는 떨어졌다. 심지어 트럼프 행정부의 최상위 종합 전략 지침서인, 12월 국가안보전략(NSS)에서는 '북한'과 '북한 비핵화'는 한마디도 없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경쟁, 동맹 관리, 국내 정치·경제 현안이 더 앞섰다.
'행위자 차원'에서 2025년 한반도 정세의 수혜자가 북한이었다면 '구조적 차원'에서는 어떠했을까? 보고서는 △불확실성이 급격히 커지면서 한반도에서 '현상 유지' 성향이 강화됐고 △전후 자유주의 국제질서 약화로 힘의 정치 부상했으며 △동북아 각국의 위협 인식 상승으로, 북핵 정세는 협력보다는 경쟁과 억지가 지배하는 구도 작동하면서 △단기적으로는 세력 균형이 충돌을 억제한 결과 '차가운 평화'에 가까운 안정이 유지됐으나 장기 불안은 해소되지 않았다고 정리했다.
"북한, 정치·외교·안보·대남·경제 전반에서 유리한 환경 만들어냈다"
'구조-행위자론'은 대표적인 사회과학 분석론이다. 한반도 안보 문제 전문가인 정 박사는 2025년 정세의 구조-행위자 요인을 종합해 △북한은 정치·외교·안보·대남·경제 전반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상당 부분 만들어냈고 핵 능력 강화가 예전만큼 큰 대가를 과격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미·북 대치는 장기 교착 상태로 굳어졌고, 이 상황은 북한에 불리하게만 작동하지 않았으며, 북한 핵 보유는 더욱 당연한 전제로 자리 잡는다 △남북 관계에서는 한국이 주도권을 회복하지 못했고 한국이 역내 강대국을 활용해 주도권을 회복할 여지는 더 좁아졌다는 세 가지 특징을 뽑았다.
그렇다면 2026년 정세는 어떻게 전개될까. 보고서는 내년 북핵 정세를 좌우할 세 가지 요인으로 "미·북 관계, 러·우 전쟁의 향방, 북한 9차 당대회"를 주목했다. 당장 내년 4월 트럼프의 중국 방문이 북·미 정상회담의 모멘텀이 될 것인지 관심거리다. 트럼프는 지난 10월30일 아시안 순방 일정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면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기 위해 연락했느냐'는 질문에 "내가 너무 바빠서 우리는 대화할 기회가 없었다"면서 "김정은과 관련해서는 다시 오겠다"고 했다. 러·우 전쟁 종전 문제도 중요 변수다. 아무리 트럼프 행정부라 해도 우크라에 파병하고 있는 북한과 의미 있는 대화를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선 전쟁이 끝나야 한다. 또 전쟁이 끝나면 혈맹이 된 러시아와 전통 후견국인 중국이 북한과 미국 간 다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반대로 전쟁이 장기화되면 러시아는 북한과의 협력을 더 강화할 가능성이 높고 북한도 미국에 손을 내밀 필요성이 줄어든다.
북한의 지난 5년을 결산하고 새로운 5년의 비전을 제시할 9차 당대회 역시 중요한 요인이다. (2025년 1월) 8차 당대회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게 분명한 북한은 9차 당대회에서는 그 수준을 상회하는 중장기 목표를 제시할 것이고, 이는 대외 전략에도 직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종합적으로 "2026년에도 기본 환경이 단기간에 크게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내다봤다. 북·중·러 협력, 미·중 경쟁, 러·우 전쟁, 트럼프 행정부의 '아메리카 퍼스트' 기조 등의 요인들이 한반도 정세를 급변이 아닌 관리 국면으로 끌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 틀 안에서 움직이면서, 핵·미사일 능력을 일상적 수단으로 정착시키려 할 것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힘의 구도를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하려 할 것이라는 진단이다.
그렇다. 2026년 한반도 정세의 핵심 변수는 역시 북한이다. 2018년 북·미 정상회담 국면에서의 핵심 변수가 트럼프였다면, 올해도 내년도 한반도 정세의 핵심 변수는 김정은이다. 이제는 그가 키를 쥐고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3일 부산 동구 해양수산부 청사에서 열린 해수부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적대적 두 국가론' 이전 북한은 '조건 있는 대화 거부'였으나…
그는 2023년 12월에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인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며 '대남 노선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천명한 이래, 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고수·강화해왔다.
그 이전까지 북한은 남북 대화를 거부할 때 조건을 내세웠다. 한·미 연합훈련 중단, 대북 제재 해제 또는 완화, '체제 비난·인권 문제' 제기 중단, 대북 전단·확성기·심리전 중단 등이 그것이었다. '조건 있는 대화 거부'였다. 그래서 그 조건이 전부 또는 일부라도 충족되면 대화 테이블에 복귀하곤 했다.
그러나 '적대적 두 국가론' 선언 이후, 남북 관계에서는 '조건 없는 대화 거부'로 달라졌다. 대화도 없고, 대화를 위한 조건 제시도 없다. 이재명정부 등장 이후 국가정보원 등 정부 차원의 접촉 제안은 물론이고 민간단체의 이런저런 움직임에도 북한은 일체 응하지 않고 있다. 접촉 거부 차원을 넘어 과거 '대남 일꾼들'에게 남측과 접촉할 경우 처벌하겠다는 지시까지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미국에 대해서만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고 진정한 평화 공존을 바란다면 우리도 미국과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9월21일 최고인민회의 연설)며 문을 열어놨을 뿐이다.
황방열 통일외교 전문위원 bangyeoulhw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