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즐겨보는 편은 아니다. 특히 남의 '연애' 프로그램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이를 즐겨보는 주변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에 와닿는 내용이 있다. 요즘 화제라는 '합숙 맞선' 프로그램도 그런 경우로, 참가자와 그 모친들이 합숙하며 짝을 찾는 내용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당사자와 어머니들의 선택이 엇갈리며, 그에 따른 희비가 교차한다. 여러 구설수와는 별개로 이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사회적 풍경은 꽤 선명하다. 최근 회차에서는 남성 출연진의 직업이 공개되자 분위기가 극명하게 갈렸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변호사에게 어머니들의 몰표가 쏟아진 반면, 국내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는 단 한 표도 받지 못했다. 한 지인은 "결혼 상대를 찾는 프로그램인 만큼 직업의 안정성과 신뢰도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평했다.
이 장면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실패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감지되는 선택지는 애초에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는 분위기가 굳어져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새해 들어 다시 언급되고 있는 '중벤스', 즉 중소기업과 벤처·스타트업 담론은 주목할 만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일부 대기업 중심 성장'에서 벗어나 기회와 과실을 고루 나누는 '모두의 성장'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실패가 오히려 성공의 자산이 될 수 있는 사회, 중소기업 전성시대를 열겠다는 메시지도 함께 던졌다.
평범한 국민들이 누구보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현실에서, 실패가 자산이 될 수 있는 사회를 말하는 장면은 솔직히 낯설게 다가온다. 한국에는 실패와 재도전이 자연스럽게 축적된 '벤처 서사'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의 중심은 오랫동안 불하 자산을 바탕으로 성장한 대기업이 차지해왔고,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처럼 미개척지를 개간한 창업 스토리가 한국 사회에 보편적으로 축적돼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노동시장과 기업 선택에도 그대로 반영돼왔다. 전체 기업의 99%, 고용의 약 80%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은 여전히 '가고 싶은 곳'이 아니다. 대기업은 거래 지속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을 바탕으로 각종 경영 리스크를 중소기업에 전가해왔다. 경기 침체와 자본시장 경색 속에서 벤처기업의 엑시트 역시 쉽지 않았다. 실패는 자산이 아니라 회복하기 어려운 낙인에 가까웠다.
이런 구조에서 중소기업과 벤처·스타트업을 키우는 일은 초기 보육이나 자금 지원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의 상생 정책은 '지원'은 중소벤처기업부, '분쟁'은 공정거래위원회, '고용'은 고용노동부로 나뉘어 있었고, 이 셋이 유기적으로 맞물린 적은 거의 없었다. 상생이 선언에 머물러온 이유다.
이런 점에서 최근 한성숙 중기부 장관이 '중소·벤처·소상공인의 성장 사다리 복원'을 제시하고, 상생을 위해 공정위와 노동부 등 관계 부처와의 협력 필요성을 언급한 것은 의미가 있다. 중기부가 거래 구조와 성장 사다리를 세우고, 노동부가 노동비용과 고용 구조의 불균형을 다루며, 공정위가 거래 관계에서의 힘의 비대칭을 교정하는 유기적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정부는 국민성장펀드 조성, 모태펀드 연장, 납품대금 연동제 확대, 기술 탈취 제재 강화 등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다. 새도약기금 역시 실패 이후의 재기를 돕겠다는 취지에서 도입된 제도다. 그러나 정책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현장의 체감이다.
대통령이 중소기업과 벤처를 통한 국가 성장의 필요성을 언급한 이후, 관계 부처들이 앞다퉈 제도 정비에 나서고 있는 점은 분명 긍정적이다. 다만 창업과 도전으로 인한 실패에 대한 근본적 두려움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정부가 말하는 유니콘기업이나 '라이징 스타' 육성은 결국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안정적인 대기업이나 전문직, 공무원만을 선호하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그럼에도 이번만큼은 다를 수 있을지, 조심스러운 기대를 다시 걸어본다.
이지우 정책금융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