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국제유가·금융시장 변동성 크게 확대된 가운데 향후 중동상황 전개에 따라 실물경제 파급영향 확대가 우려됩니다." 이는 재정경제부의 '중동상황 관련 대응현황'에 대한 국무회의 보고 내용으로 핵심적 현황 판단입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국제 정세의 충격이 금융시장을 넘어 실물경제로 확산될 가능성을 경고한 셈입니다. 실제 국제 유가와 환율,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동시에 나타나자, 정부는 1997년 유가 자유화 이후 29년 만에 석유제품 최고가격제 도입을 꺼내들었습니다.
매점매석 금지와 가격 담합 조사 칼날까지 추진하는 것도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물가, 소비, 산업 활동 전반에 미칠 충격을 차단하기 위한 비상 대응격입니다. 9일 기준 브렌트유(102.9 달러)와 서부텍사스산원유(102.0 달러)는 전월 대비 50% 안팎의 폭등세를 기록한 바 있습니다. 국내 휘발유와 경유 가격은 리터당 1900원 선을 돌파하며 민생 경제를 옥죄고 있습니다.
국내 주유소 기름값이 가파르게 상승한 지난 8일 대구 시내 한 주유소에서 직원이 주유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재명 대통령은 위기 상황을 틈타 폭리를 취하는 정유업계를 향해 '기업 윤리의 문제'라며 유가 급등 국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시장 왜곡에 경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행정 절차로 지연된 기간만큼 가격 동결 기간을 연장하는 등 '누구도 억울하지 않은 가격 관리'를 주문한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정부의 대응이 단순히 가격 억제에만 머물지 않지 않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현행 휘발유 7%, 경유 10% 수준인 유류세 인하 폭을 법정 한도인 37%까지 확대할 수 있는 여력을 뒤로 일률적 인하가 초래할 양극화 심화에 대해 경계감을 표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유류세 정책은 주요 대응 중 선제적으로 꼽히던 수단이었습니다. 지금껏 이어온 가격 인하 효과는 휘발유 리터당 약 57원, 경유 58원, LPG 20원 수준입니다. 주무부처는 국제 유가 상승이 지속될 경우 유류세 인하 폭을 추가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해왔으나 대통령의 정책 선택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유류세를 추가로 인하하면 소비자 가격을 낮추는 효과가 있지만 고소득층에도 동일하게 혜택이 돌아가는 문제가 있습니다. 반면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직접 지원은 소득 재분배 효과와 소비 진작 효과가 있지만 물가 상승 압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결국 정부는 유류세 인하와 취약계층 지원을 결합하는 정책 조합을 고심하고 있습니다. '소비자 직접 지원'을 병행하는 정교한 정책 믹스 외에도 반도체 업황 회복으로 확보된 세수를 활용하는 '국채 발행 없는 민생 추경(추가경정예산)'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통신사진기자단)
이는 재정 건전성과 복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실용주의적 고뇌로 평가됩니다. 문제는 중동 위기의 파급 효과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정부는 필요할 경우 100조원 규모 채권시장 안정 프로그램을 가동할 수 있는 체계를 갖췄지만 중동 상황 장기화 때는 구조적 취약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어 긴장감이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이번 위기는 수십 년간 반복돼 온 화석연료 의존 구조의 취약성을 다시금 증명하고 있습니다. 기후솔루션 측에 따르면 한국은 원유 수입의 약 70%,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의 약 18%가 호르무즈 해협 리스크에 노출돼 있습니다. 물리적인 공급 중단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시장이 먼저 반응하면서 비용이 급격히 상승하는 구조입니다.
이미 국제 유가와 환율, 해상 운임이 동시에 급등하는 현상이 이를 방증하고 있습니다. LNG 운반선 운임은 2월 말 대비 약 650% 폭등하며 하루 30만 달러 수준까지 치솟았습니다. 초대형 원유운반선 운임도 역대 최고 수준을 경신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비용 상승은 정유와 석유화학, 발전 산업 등 국가 기간산업의 원가 부담으로 직결되고 실물 경제 전반으로 전이될 수밖에 없는 불안 구조를 띕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에너지 조달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973년 1차 오일쇼크와 1979년 2차 오일쇼크, 1990년 걸프전, 2019년 사우디 유전 공격,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023년 홍해 사태에 이어 이번 호르무즈 긴장까지 에너지 공급망 충격은 반복돼 왔습니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지난 6일 서울 서초구 한강홍수통제소에서 열린 태양광 관련 협회·단체 간담회를 통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기후에너지환경부)
이 대통령도 "위기 상황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이번 기회에 대체에너지 전환을 속도전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며 김성환 기후에너지부 장관에게 에너지 생산 구조 자체의 전환을 주문했습니다. 에너지 전환은 단순한 환경 정책이 아닌 에너지 안보의 문제라는 인식이 반영된 발언으로 읽힙니다.
결국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앞으로도 외부에서 들여오는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구조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에너지 생산 구조 자체를 바꿀 것인지에 대한 선택입니다.
해외에서는 이미 위기를 구조 전환의 계기로 활용한 사례가 나오고 있습니다. 유럽연합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리파워EU(REPowerEU) 계획을 통해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크게 낮췄습니다. 가스 소비 자체를 줄이고 재생에너지 비중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에너지 구조를 빠르게 전환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산업적 기반이 충분합니다. 조선 산업을 중심으로 해상 구조물과 대형 설비의 제조 능력이 이미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량을 해상풍력과 전력망, 청정에너지 산업으로 확장할 경우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번 중동발 충격은 단순한 유가 상승 문제를 넘어 한국 경제의 구조적 과제를 다시 묻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겁니다. 단기적으로 가격 안정과 금융·외환시장 관리가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고 산업 구조를 전환하는 전략이 절실한 때입니다.
위기는 언제나 경제의 취약한 지점을 들쑤십니다. 동시에 변화의 필요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찰나이기도 합니다.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위기를 관리하는 정책과 위기를 넘어서는 전략을 동시에 준비하는 일입니다.
지난 2월23일 서울 중구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