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종용 선임기자] 은행권이 정치권과 금융당국에 제시한 규제 완화 건의가 줄줄이 퇴짜를 맞고 있습니다. 규제 완화에 앞서 대내외 시장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게 당국의 입장인데, 6·3 대통령선거 등 정치 일정을 고려한 판단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차기 정부 출범 이후 당국 수장들 인선과 정책 검토에 필요한 물리적 시간을 고려하면 전향적인 규제 완화책이 당장 나오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29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등 금융당국은 최근 은행권의 규제 완화 건의안을 대부분 불수용하거나 추후 검토로 보류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올 들어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 가진 은행장 간담회에서 은행권은 1가상자산거래소-다은행 허용과 기업대출 관련 위험가중치 규제 완화 등을 요구했습니다.
정치권이 우선적으로 은행권 건의 사항을 취합했지만, 법 개정 사항이 아닌 규정이나 유권해석 변경은 소관부처인 금융당국이 결정해야 하는 사안입니다. 1가상자산거래소-다은행 체제에 대해 금융당국은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특정 거래소의 독과점을 더 심화시킬 수 있는 데다 자금세탁 방지 대응 체계도 취약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21년 특정금융정보거래법(특금법) 시행에 따라 국내 가상자산거래소들은 '원화거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은행과 제휴를 맺고, 실명 인증 계좌를 발급받아야 합니다. 은행권이 실명 인증 계좌를 통해 가상자산거래소의 자금세탁 방지 체계를 비롯해 내부통제 수준, 재무건전성 등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선 △업비트-케이뱅크 △빗썸-KB국민은행 △코인원-카카오뱅크 △코빗-신한은행 △고팍스-전북은행으로 5대 원화거래소가 은행과 제휴를 맺고 있습니다. 거래소 한 곳과 여러 은행이 제휴를 맺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게 은행권 요구사항입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1거래소-1은행' 체제가 법으로 규정한 강제사항은 아니지만 자금세탁 리스크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2단계 가상자산법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얘기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당국 내부에서는 은행권의 기업대출 확대를 위한 위험가중자산(RWA) 관련 규제 완화에 대해서도 부정적 기류가 감지됩니다. 은행권은 RWA 규제를 완화하면 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을 늘릴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상호관세, 고환율 등의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 자금 공급을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달라는 것입니다.
다만 미국 상호관세가 유예되고 협상 국면에 돌입한 데다 원달러 환율이 안정 국면에 들어선 만큼 도입 사유가 부족하다는 견해입니다. 금융당국의 다른 관계자는 "관세 충격에 선제적으로 대비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기업대출 관련 은행 규제 완화가 우선순위가 아니다"며 "시행 일정이나 적용 기한 등 구체적인 논의는 없는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정치권에 제시한 은행권의 규제 완화 건의안이 줄줄이 보류됐다. 지난 9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민생 경제 및 은행권 경쟁력 제고를 위한 국민의힘-은행권 현장 간담회'에서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의원들이 시중은행장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오는 6월 조기 대선과 새 정부 출범 등 정치 일정을 고려하면 금융당국이 전향적 규제 완화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은행권의 규제 완화 건의안이 보류되는 가운데 반금융적 법안은 일사천리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가산금리 산정 체계를 손보는 은행법 개정 작업에 대해서는 은행권이 이미 백기를 들었습니다.
최근 민주당 주도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된 은행법 개정안은 대출 금리 산정 과정에서 가산 금리에 보험료·출연금 등을 반영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술보증기금·신용보증기금·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지역신용보증재단 출연금은 출연요율의 50% 이상을 대출금리에 포함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이 담겼습니다. 당초 개정안에는 은행 임직원에 대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 등 처벌 조항이 있었지만, 은행권은 해당 조항 삭제를 건의하는 대신 개정안을 수용한 것입니다.
은행연합회 등 금융권은 각 대선주자 캠프 등에 기존에 제시한 규제 완화 요구 사항을 포함한 정책 과제를 건의할 예정입니다. 은행권 관계자는 "각 정당의 주요 대선주자가 정해지거나 새 정부가 출범을 앞두면 업계 요구 사항을 담은 건의 사항을 전달할 것"이라며 "금융산업 발전이라는 주제로 6개 금융협회가 공통으로 제안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금융당국은 다은행-1가상거래소 허용, 기업대출 관련 위험가중치 규제 완화 등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사진은 정부서울청사 내 금융위원회 모습. (사진=뉴시스)
이종용 선임기자 yong@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