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오승주 기자] 김성태 기업은행장은 2023년 1월 내부 출신으로는 다섯 번째로 은행장에 올랐습니다. 30년 넘게 기업은행에 몸담은 정통 '기은맨'으로, 윤석열정부가 당시 금융업 전반에 확산된 '관치 논란'을 의식해 선택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김 행장은 마케팅전략부장, 소비자보호그룹장, 경영전략그룹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쳐 IBK캐피탈 대표이사와 기업은행 전무이사(수석부행장)를 역임한 후 행장에 취임했습니다. 김 행장 취임 2년여 만에 기업은행은 최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대규모 금융사고와 노사 갈등, 국책은행으로서의 정체성 혼란 등 복합적 위기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김 행장의 리더십에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국책은행 정체성 흔들…'반민반관' 논란
김성태 기업은행장이 지난 1월 서울 중구 전국은행연합회에서 열린 민생경제 회복을 위한 민주당-은행권 현장간담회에 참석해 있다. (사진=뉴시스)
기업은행은 중소기업은행법에 따라 중소기업에 필요한 정책금융을 제공하는 국책은행으로, '국가는 중소기업을 보호·육성하여야 한다'는 헌법 제123조 제3항의 취지에 부합하는 활동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실제 운영에서는 시중은행과의 차별성이 뚜렷하지 않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금리 대출 문제입니다. 자금난에 처한 중소·벤처기업들이 기업은행을 찾지만, 정작 대출금리가 시중은행과 큰 차이가 없어 정책금융의 혜택을 체감하기 어렵다는 지적입니다. 2023년 국정감사에서 강훈식 민주당 의원은 "벤처대출 시범사업의 금리가 정책 상품임에도 6~7% 정도로 진행되고 있는데 2~3% 정도로 맞춰달라는 요구가 많다"고 지적했는데요. 실제로 13일 기준 IBK벤처기업대출 전월 평균 금리는 5.91%로 나타났습니다.
홍보 예산 집행 방향도 문제로 지목됐습니다.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2019년부터 2024년 8월까지 총 485건의 이벤트에 약 171억5500만원이 사용됐다”면서 "이 가운데 개인 대상 이벤트가 78.4%로 가장 많고 기업은 17.7%"라고 밝혔습니다. 강 의원은 "중소기업보다는 개인을 대상으로 매년 수십억원씩 집행하는 것은 중소기업은행법상 설립 목적과 배치되는 예산 투입"이라고 지적했습니다.
882억 부당 대출…책무구조도 첫 사례 되나
올해 초 확인된 대규모 금융사고는 기업은행 내부통제 시스템의 심각한 허점을 드러냈습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3월 기업은행에서 882억원 규모의 부당 대출이 발생했으며, 전·현직 직원들과 그 배우자, 친인척 등이 연루됐다고 발표했는데요. 지난 12일 수백억원대 부당 대출 의혹을 받는 기업은행 전·현직 직원들이 각종 청탁과 금품 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특히 금감원 검사 과정에서 은행 내부에서 자체 조사 자료와 사내 메신저 기록을 삭제하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한 사실까지 밝혀졌는데요. 조직적 내부 공모와 문서 조작, 은폐 정황까지 드러나며 금융권 도덕성과 내부통제 시스템 전반에 대한 깊은 우려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지난 2월 이복현 전 금감원장은 "기업은행 금융사고도 결국 끼리끼리 문화, 온정주의 문화, 외연 확장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내놨습니다. 김 행장은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금감원 감사 결과를 철저한 반성의 기회로 삼겠다"고 사과했지만, 실질적 후속 조치나 경영진의 책임 있는 자세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올해 1월부터 시행된 책무구조도 제도의 첫 적용 사례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책무구조도는 금융사고 발생 시 임원들에게 내부통제 실패 책임을 직접 물을 수 있는 제도로, 법적 책임까지 연결될 수 있어 일종의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으로도 불립니다.
책무구조도는 사고 적발 시점이 아닌 발생 시점을 기준으로 적용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이번 사건이 제도 적용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관련 자료 삭제 등 은폐 행위가 제도 시행 이후인 올해 1월 이후에 이뤄진 점을 고려하면, 김 행장을 비롯한 현 경영진에게 책임이 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첫 총파업, 노사 갈등 극한 대립
지난해 12월 서울 중구 기업은행 본사 앞에서 한국노총 금융노조 기업은행지부 총파업 출정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기업은행의 위기는 금융사고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12월 기업은행 노동조합은 1973년 노조 설립 이후 처음으로 단독 총파업에 돌입했는데요. 서울 중구 본점 앞에 3200여명의 직원들이 집결하며 노사 갈등은 극한으로 치달았습니다.
파업의 배경에는 시중은행 대비 70% 수준인 임금과 1인당 600만원 이상 미지급된 시간외수당 문제가 있습니다. 노조는 기업은행의 임금이 기획재정부가 정하는 총액인건비제도로 인해 제약을 받고 있다며, 시중은행과 동일한 업무 강도와 경쟁 환경에서 일하면서도 차별적 처우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갈등 국면에서 김 행장이 사태 수습의 중심이 되기는커녕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처우 개선 문제에 대해서는 국책은행 구조상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금융사고에 대해서는 기존 쇄신안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을 유지하며 책임 회피적 인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노조는 김 행장을 포함한 경영진의 총사퇴를 요구하며 추가 파업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습니다.
김 행장의 임기는 내년 1월까지로 7개월가량 남아 있지만 내부 신뢰는 이미 크게 흔들린 상태입니다. 남은 기간 조직을 추스르고 갈등을 봉합할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회의론이 지배적입니다.
한 기업은행 관계자는 "행장 취임 당시 내부 출신을 요구했던 이유는 은행 직원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를 바탕으로 직원들 편에서 설득하고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오히려 외부 출신보다 힘만 더 없고 의지도 부족하다. 정부에 쓴소리 한마디 못 하고 직원들을 위한 실질적 변화보다는 면피성 행보만 이어가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어 "시중은행과의 임금 격차 같은 구조적 문제들을 설령 정부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내부 출신 행장이 나서서 해결해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라며 "직원들 편에서 적극적으로 싸워주기를 원했는데 전혀 그런 모습은 없었다"며 실망감을 드러냈습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부 배당금을 과도하게 책정해 관료들의 환심만 샀을 뿐 중소기업인을 비롯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은 김 행장의 리더십에 의문을 품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오승주 기자 sj.o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