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상대 한국 외교, 'K-민주주의'가 무기다

(황방열의 한반도 나침반)'민주주의 모범 국가' 자산 활용해야

입력 : 2025-08-26 오전 6:00:00
"영국정부는 소위 동방의 강대국들보다 훨씬 더 자주 바뀌었다. 파머스턴, 글래드스턴, 디즈레일리와 같은 영국의 정치 거물 중 아무도 메테르니히와 니콜라이, 비스마르크처럼 밀게 임기를 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영국의 정책은 탁월할 정도로 일관성이 있었다. 일단 특정 노선으로 가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집요하고 완강한 정도로, 그리고 믿음직스럽게 그 노선을 추구했다. 그랬기 때문에 영국은 유럽의 안정을 위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위기 상황에서 영국이 하나의 목표에 매진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원인은 대의제라는 영국 정치제도의 성격에 있었다. 1700년부터 영국 외교정책에서 여론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18세기 유럽에서 어떤 다른 국가도 외교정책과 관련하여 '반대' 여론이란 것이 없었다. 영국에서는 그것이 제도에 내재돼 있었다. 영국 외교정책이 공개 토론을 통해 성장해 왔기 때문에 영국 국민은 전시에는 놀라울 정도로 단결력을 보여주었다."(『헨리 키신저의 외교』, 97쪽)
 
미국 외교의 '구루' 키신저는 근대 이후 세계 외교를 분석하면서 영국 외교의 강점을 이렇게 평가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린, 근대 세계 최강국 영국의 대외정책은 전시에도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과 단결력을 유지했는데, 이는 그 정책이 '여론', '공개 토론'을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점을 영국과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 같은 다른 강국들의 결정적 차이로 꼽았다. 결국 '민주주의'가 관건이라는 통찰이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재표결이 가결된 14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열린 '내란 수괴 윤석열 즉각 탄핵' 범국민 촛불대행진에서 시민들이 기뻐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키신저 "영국 외교, 정책 토론 통해 성장전시에 놀라운 단결력"
 
전 세계가 주목했던 2016~2017년 '촛불혁명'을 통해 등장한 문재인정부에는 한국의 민주주의 그 자체가 대표적 외교 자산이었다. 취임 첫해인 2017년 12월 재외 공관장 초청 만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전 세계는 촛불혁명을 일으킨 우리 국민들을 존중했고, 덕분에 저는 어느 자리에서나 대접받을 수 있었다"고 한 게 빈말이 아니었다. 
 
당연히 문 대통령은 이를 적극 활용했다. 그는 9월 국제연합(UN) 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새 정부는 촛불혁명이 만든 정부"라면서 "이제 대한민국은 그 힘으로 국제사회가 당면한 현안을 해결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자 한다"고 자부했다. 이어 "나는 촛불혁명을 통해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지구촌에 평화의 메시지를 던진 우리 국민들을 대표하고 있다"고 전제한 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북한이 스스로 평화의 길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자신의 대북 구상을 발표했다. '촛불혁명'이라는 자산이 문재인정부의 대북정책이 단순 개별 정권 차원이 아니라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것이라는 '민주적 정당성'을 강화하면서 국제적 설득력을 배가했다. 
 
지금 다시 한·미 간 현안이 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문제는 당시에도 큰 논란거리였다. 그때도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무임승차하고 있다면서 당시 분담금 규모의 5배가 넘는 50억달러(약 6조원) 수준의 대폭 인상을 요구했으나, 문 대통령은 "국민이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며 "국회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고 맞섰다. 협상은 결국 트럼프 행정부를 지나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 2021년에 전년 대비 13.9% 인상된 1조1833억원 규모로 타결됐다. '촛불혁명'을 배경 삼은 정부가 "국민적 합의 없는 협정은 불가능하다"며 버티기에 나서 성공한 것이다. 
 
문재인정부가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전 국민적 시위를 거쳐 등장한 데 이어 이재명정부는 오히려 실패하기 어렵다는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를 시민들이 직접 행동으로 막아내고 출범했다. "한국은 모범적 민주주의 국가"(바이든 행정부의 블링컨 국무장관),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제 우리만의 민주주의가 아니다"(최종건 연세대 정외과 교수)라는 평가는 과찬이 아니다. 
 
민주당 대표 시절, '빛의 혁명'을 직접 작명한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후에도 "오랜 독재의 질곡에서 벗어나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민주주의 모범 국가로 우뚝 섰다"(6월6일 현충일 추념사), "우리 국민들이 직접 보여준 오색 빛 K-민주주의가 길을 찾는 세계의 민주 시민들에게 등불이자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7월13일 세계정치학회 서울총회)이라고 그 의미를 강조했다. 
 
물론 'K-민주주의', 즉 한 나라의 민주적 정당성이 대외정책의 만능 검이 될 수는 없다. 강대국 간 이해관계는 그쯤은 가볍게 뛰어넘고, '미국 우선주의'를 내걸고 기존 국제질서를 헤집고 있는 트럼프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유력한 무기임은 분명하다. 
 
24일 일본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가는 전용기 내 기자간담회에서 이 대통령은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미국 측에서 유연성 요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로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고, 농축산물 추가 개방 요구 가능성을 묻는 질문엔 "이미 큰 틀의 합의를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상황에서 이를 쉽게 뒤집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답했다. 우선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미국산 농축산물 수입 문제와 관련해 한·미 간 이견이 확인된 셈이다. "협상 분위기가 생각만큼 험악하지는 않다"고 했지만 꼭 그런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관세 협상에서 한국이 약속한 3500억달러 투자를 정상회담을 통해 문서화하는 문제로 미국이 한때 정상회담 취소 가능성까지 거론했다고 한다. 외교부 장관이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건너뛰고 바로 미국으로 가고, 대통령 부재 시 상황 관리를 위해 한국에 남아 있는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방미하는 이례적인 상황들이 이를 방증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한일 정상회담을 마치고 일본 도쿄에서 미국 워싱턴 D.C.로 향하는 공군1호기에서 기내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승리하는 방법은 오직 '더 많은 민주주의'뿐"…대미 협상도 마찬가지
 
이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일본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향하는 전용기에서 전용기 기내 간담회에서 국민의힘 차기 대표 선거가 반탄(탄핵 반대)파 후보 간 대결로 압축된 것과 관련해 "공식적인 야당의 대표가 법적 절차를 거쳐 선출되면 당연히 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외교 문제에 대해서도 이런 자세로 국민의힘을 비롯한 야당과 대화하고 시민사회와 소통해야 한다. 최대한 솔직하게 협상 내용을 공개해 국내 여론이 형성되도록 하고 이를 대미 협상에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이 증명해낸 것처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승리하는 방법은 오직 '더 많은 민주주의'뿐”이라고 했다. 지금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하는 우리에게, 뚜렷한 국력 차이를 상쇄할 수 있는 길 역시 '더 많은 민주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황방열 통일외교 전문위원 bangyeoulhw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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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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