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프라임]재건축이 지우는 '추억 한 줌'

입력 : 2025-09-12 오전 6:00:00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뉴스토마토 강영관 기자] 신혼 시절 서울 변두리 오래된 시영아파트를 선택한 건 순전히 오래된 나무들 때문이었다. 집은 낡고 좁았지만, 단지 내 나무들이 마음을 끌었다. 단지를 빙 두른 키 큰 나무들, 중앙에 우뚝 선 아름드리 나무들은 마치 도심 속 숲 같았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져 굳이 여의도 윤중로를 찾을 필요가 없었고, 여름이면 짙은 녹음이 햇살을 막아주었다. 가을이면 단풍이 불타오르듯 단지를 물들이고, 겨울이면 눈꽃이 소복이 피어 하얀 풍경을 선물했다. 
 
아파트와 나무는 함께 세월을 먹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집은 점점 낡아갔지만, 그와 동시에 나무들은 가지를 뻗고 뿌리를 깊게 내리며 단지의 중요한 일부가 됐다. 아이들은 계절마다 달라지는 나무 풍경을 배경 삼아 뛰놀았고, 주민들은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했다. 나무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였고, 서로를 공유하는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됐다. 
 
이곳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냈다. 그들에게는 이 아파트가 이른바 '나의 살던 고향'이 됐다. 운동장에서 공놀이하던 기억, 여름밤 창밖에서 들려오던 매미 소리, 눈 오는 날 나무 아래 쌓이던 눈더미 같은 풍경이 모여 아이들의 기억 속 '집'을 이뤘다. 
 
그런데 내가 살았던 오래된 아파트에도 이제 재건축 현수막이 걸려 있다. 곧 재건축이 되고 오래된 나무들은 사라질 것이다. 사실 서울과 수도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주택 정비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11일 7만6000가구로 구성된 상계·중계·중계2 지구를 10만3000가구 규모로 탈바꿈하는 지구단위계획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앞서 목동신시가지 아파트들도 잇따라 정비구역으로 지정 고시되면서 재건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강남·북 할 것 없이 노후 주택을 신축 아파트로 탈바꿈하는 사업이 경쟁적으로 추진 중이다. 
 
정부 또한 지난 7일 재개발·재건축 사업성 및 리모델링 제도 개선 방안 등의 내용이 담긴 주택공급 방안을 발표했다. 공급 촉진을 위해 구도심 정비사업 활성화에 중점을 뒀고, 속도감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뒀다. 이를 통해 5년간 총 135만가구, 연평균 27만가구를 수도권 공공택지와 서울 도심지 등에 공급한다고 한다. 
 
공사가 진행되면 나무들은 예외 없이 잘려 나가고 뽑히는 신세가 된다. 깊게 뿌리 내린 기억과 풍경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물론 새 아파트 단지에도 나무는 심어진다. 고층 아파트 사이 사이 건설사들은 전국에서 공수한 벚나무, 배롱나무, 팽나무 같은 고급 조경수를 들여와 녹지로 꾸민다. 신축 아파트 입주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땅 깊이 파낸 자리에 새로 심은 나무들은 뿌리가 얕아 당분간은 지지대에 매달려야 한다. 한동안 바람에도 흔들리고, 그늘도 제대로 드리우지 못한다. 아파트 속 작은 생태계가 다시 자리 잡으려면 또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집이란 단순히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닐 것이다. 낡았지만 나무와 함께 살아온 공간이 주는 편안함은 누구에게는 고층 아파트의 화려한 외관이나 최신식 편의시설보다 더 큰 가치로 다가올 것이다. EBS 다큐멘터리 '건축탐구-집'에서 한 출연자는 이렇게 말했다. "집이란, 내가 편히 숨 쉴 수 있는 곳, 상처를 드러내도 괜찮은 곳."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강영관 기자 kwa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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