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기자] 미국에 이은 유럽연합(EU) 철강 관세 인상에 산업통상부가 긴급 논의에 돌입했지만 세계 무역이 흔들리는 구조적 징후는 더욱 뚜렷해지는 분위기입니다. 보호무역주의의 불길이 번지면서 국가 간 기술과 공급망을 둘러싼 전략 수단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EU의 철강 수입 쿼터(관세할당) 절반 축소는 단순히 철강에만 국한된 사안이 아니라는 평가입니다. 미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일본의 공급망보호법, 중국의 핵심 원자재 수출 통제 등 글로벌 무역 질서가 안보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의 연장선인 만큼, 생존을 넘어 주도권을 거머쥘 전략 해법이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산업통상부는 10일 박종원 통상차관보 주재로 유럽연합(EU) 철강 수입쿼터(TRQ, 관세할당) 도입 관련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향후 대응 계획을 논의했다. (사진=뉴시스)
양대 시장 '이중 압박'
10일 무역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보호무역의 확산에 따라 단기적으로 수출 둔화가 불가피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이에 따라 철강, 석유화학, 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은 미국·EU의 관세 조치와 환경 규제 강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더욱 커졌습니다.
올해 하반기 세계 교역 질서가 1990년대 이후 가장 거센 변곡점을 맞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특히 EU가 철강에 최대 50%의 보호관세 부과 방침을 발표하면서 미국발 관세 도미노 현상이 번지고 있습니다. 우리 수출기업들로서는 양대 시장의 이중 압박에 놓인 셈입니다.
지난해 기준으로 한국의 철강 수출 중 EU,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13.5%, 13.0%입니다. 양대 시장을 합치면 약 26.5%에 달합니다. 한국무역협회 집계를 보면 지난해 한국의 '대EU 철강 수출액'은 44억8000만달러(약 6조2800억원), 대미 수출액은 43억4700만달러(약 6조1750억원)로 각각 집계됐습니다.
연간 약 88억2700만달러(약 12조4550억원)의 수출 시장인 겁니다. 현재 EU만 놓고 보면 현행 세이프가드에 따른 쿼터 및 관세율이 유지되는 만큼, 당분간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제안 조치가 수개월이 소요되는 EU의 일반 입법 이행 절차를 거쳐 내년 확정될 경우 우리나라의 철강 수출 2위 시장인 EU 수출에 상당한 영향이 불가피하다는 게 정부의 판단입니다.
철강업계는 단순한 무역 규제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공급망 전반에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각국이 수출 장벽을 높이는 상황에서 통상 방어 조치가 상대적으로 엄격하지 않은 국가를 대상으로 '밀어내기 수출'이 본격화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습니다.
이는 국내 시장의 가격 불안과 공급과잉으로 이어질 수 있어 정부의 통상 방어 조치 강화가 시급하다는 목소리입니다. 산업부 측은 "EU 측이 쿼터 물량 배분 시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에 대해 고려하겠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만큼 다양한 공식·비공식 협의 채널에 적극 임해 국내 업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등 우리 이익을 최대한 확보해 나갈 예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세계무역기구(WTO)와 한·EU FTA상 적절한 채널의 활용도 지속 검토해 나간다는 방침입니다.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은 이달 중 수립키로 했습니다.
지난 2일 경기 평택항에 수출용 컨테이너들이 쌓여 있다. (사진=뉴시스)
"FTA 재편·CPTPP, 불리한 여건 개선"
전문가들은 EU 조치가 단순한 철강 규제에 그치지 않고 탄소·보조금·공급망을 둘러싼 신보호무역의 신호탄이라는 점에 무게를 둬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세계가 보호무역으로 회귀하는 듯 보이나 실상은 '세계화의 재배치' 과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판단입니다. 더욱이 국가별 이해관계와 기술 표준, 환경 규범이 새롭게 엮이면서 자유무역의 개념이 재구성되는 등 EU 철강 관세가 그 단면이라고 지목합니다.
FTA 재편의 불가피성이 거론되고 있는 배경입니다. FTA가 더 이상 단순한 관세 인하의 수단이 아닌 기술·환경·안보가 얽힌 경제 안보 조약으로 재정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흐름 속에 공급망 연계형, 탈탄소 인증형 FTA로 체질을 바꾸지 않으면 수출 주도 성장의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지배적입니다.
예컨대 EU는 25년 만에 메르코수르와의 정치적 협상 타결을 이끌어낸 바 있습니다. 영국·인도의 양자 FTA 합의, EU·인도네시아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 합의 등도 대표적입니다. 소규모 개방경제국가인 우리나라도 FTA를 적극 활용하는 등 시장 점유율 확대·규범 선도, 공급망 안정화 지원의 필요성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정부가 가입 검토를 공식화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도 기존 FTA에 비해 수출 시장 확보,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 생산 비용 절감 등 경제적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강금윤 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우리도 공급망과 수출 시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FTA 체결을 확대하고 기체결 협정 업그레이드 노력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며 "소규모 개방경제국가인 한국이 첨단산업 분야 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FTA를 통해 작은 내수 시장을 극복하고 글로벌 수요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이어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 첨단산업은 기술 진입장벽이 높고 초기 점유율이 장기 우위로 고착되는 승자독식 구조로 FTA를 적극 활용해 시장 점유율 확대·규범 선도, 공급망 안정화 지원이 필요하다"고 조언했습니다.
그는 "CPTPP 가입은 철강·섬유 등 업종에서 경쟁국 대비 불리한 여건을 개선할 수 있으나 기계·정밀화학·자동차부품 등 일본과 기술 격차가 존재하는 업종은 경쟁력 약화 등 부담이 발생할 수 있어 산업별 이해관계 조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지난달 14일 부산 강서구 부산항신항 부두에서 수출입 컨테이너 선적 및 하역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세종=이규하 기자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