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고대 그리스인들은 바다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습니다. 바다는 신의 얼굴인 동시에 인간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었죠. 평온한 수면은 안온함을, 일렁이는 파도는 예기치 않은 위기를 비추었습니다. 거기엔 단순히 그리스 신화의 '신의 분노'가 아닌 인간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의 내면적 폭풍을 상징하는 분노·질투·두려움, 그리고 사랑의 욕망이 얽혀 소용돌이치는 '무의식의 심연'이 내제돼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농어업이 마주한 현실은 거센 글로벌 무역의 파도 앞에 놓인 작은 어선과도 같습니다.
지난달 25일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린 '2025 대한민국 농업박람회'에서 농업 특화 인공지능(AI) 기술 로봇을 시연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보호무역주의의 부상과 글로벌 가치사슬, 공급망 재편 등 우리 통상 환경이 직면한 현실은 또 다른 도전, 그리고 적극적인 대응입니다. 거세게 덮쳐올 파도는 결국 바람에 의해 결정되듯 바람은 언제나 변화를 몰고 옵니다. 그러나 변화를 맞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바람은 재앙이 됩니다. 이틀간 진행된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던진 수많은 화두 중 그 바람의 방향을 예견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 한국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논의는 급물살이 요구되는 당면 과제인 동시에 농축수산물 시장의 급격한 개방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59개국과 22건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정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FTA만으로는 공급망 안정성 확보, 첨단산업 규범 대응, 디지털 무역 확장을 뒷받침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를, 중국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으로 경제권을 구축했습니다. 미국 탈퇴로 일본이 주도하는 CPTPP는 새로운 무역 질서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특히 반도체·배터리·친환경 산업 등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경제 안보' 차원으로 확장되면서 한국의 CPTPP 가입은 단순한 시장 개방이 아닌 국가 경제의 생존 전략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15일 서울 시내의 한 대형마트에서 소비자가 사과를 고르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러나 CPTPP의 높은 자유화 수준은 농어민들에게 구조적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이미 다수의 국가와 FTA를 맺어왔고 개방 수준을 점점 높여왔습니다. 그럼에도 민감 품목을 보호하거나 개방 예외를 확보한 FTA와 달리 CPTPP는 방어 여지가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정감사장에서 김선교 의원이 던진 질문은 CPTPP 가입으로 농산물 관세 피해액이 얼마나 될 것으로 보냐는 물음이었습니다. "2022년 기준 853억원에서 최대 4400억원 수준입니다. 관세 철폐 효과만 고려했을 때입니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담담하게 답했지만 그 답변 속엔 묵직한 현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농업이라는 업의 근간, 그리고 그 위에 얹힌 지속가능성엔 물음표를 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CPTPP 농식품 평균 관세 철폐율 ‘96.1%’. 우리나라가 지금껏 맺어온 FTA의 평균(72.4%)보다 훨씬 높은 수준입니다. "사실상 전면 개방 수준 아니냐"는 지적에 장관도 "상당한 영향이 예상된다"며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이어지는 질문에서는 "(지난해) 영국이 새로 가입한 이후의 피해 규모는 아직 연구를 시작하는 단계"라고 답했습니다. 즉, 정부는 피해 분석조차 없는 상태에서 개방 검토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지난 1일 광주 서구 매월동 서부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손님이 생선 가격을 묻고 있다. (사진=뉴시스)
CPTPP 가입이 현실로 이뤄질 경우 신선 과일류, 미개방 곡물, 축산물, 수산물 전반이 협상 테이블로 오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수산물 개방은 해양수산부의 2022년 수산업계 간담회를 통해 '사실상 전면 개방'을 예측한 바 있습니다. 당시 수산물 시장 개방률이 99.4%에 달할 것으로 추산해왔습니다. 연평균 피해액은 최대 724억원 규모로 기존 한·미, 한·중, 한·유럽(EU) FTA로 인한 피해액(584억원)을 상회하는 수준입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지만 정부는 관련 연구용역을 단 2건 발주하는 데 그쳤습니다. 수산보조금 개편이나 피해 대응책 마련은 개점휴업 상태이며 '대외비'를 이유로 업계와의 소통도 끊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그 사이 협상 대상국은 늘었고 수입 어류는 이미 시장을 점령했습니다. 칠레산 연어, 베트남산 흰다리새우, 일본산 냉동 오징어가 수산물 코너를 채우는 현실에서 국산 어획물은 '바다에서 잡힌 고기'가 아니라 '시장에 갇힌 생선'이 되어가고 있는 꼴입니다.
"수산물 시장 개방 수준 99.4%, CPTPP 가입 검토를 중단해야 한다"는 전종덕 진보당 의원의 지적은 뼈아픈 대목입니다.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닌 어민 생존선에 대한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농어업의 전면 개방은 피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준비 없는 개방은 바람 앞 이삭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CPTPP 가입이 현실화될 경우 신선 과일류, 미개방 곡물, 축산물, 수산물 전반이 협상 테이블에 오르는 등 사실상 전면 개방을 예측하고 있다. (사진=농림축산식품부·뉴시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