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근윤 기자] 우리나라가 해외로 원자력발전소를 수출할 때 미국 기업 웨스팅하우스에 대당 1조원을 50년 동안 지급하는 내용이 공개되자 '노예계약'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그런데 원래 웨스팅하우스와의 협약은 '무기한 계약'이었으나, 한국전력 이사회가 반대 의견을 낸 끝에 '50년 계약'으로 협의된 걸로 확인됐습니다. 윤석열정부가 체코 원전수출을 치적으로 삼으려던 탓에 웨스팅하우스 협약도 졸속으로 끝난 만큼, 애초 웨스팅하우스의 무리한 계약을 왜 받아줬는지 등의 과정을 샅샅이 살펴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간 어떤 일들이 벌어진 걸까요. <뉴스토마토>는 두 달에 걸친 취재와 복수 관계자의 증언을 종합, 지난해 7월 체코 원전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후 올해 1월 노예계약이 맺어지기까지 과정을 복기했습니다.
2024년 8월, 한전·한수원 '팀코리아'-웨스팅하우스 협상
웨스팅하우스와 원전 관련 협약을 체결하는 과정을 보려면, 지난해 8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2024년 8월 초 체코 원전수출을 위한 팀코리아(한전, 한국수력원자력)는 미국 워싱턴DC 출장길에 올라 웨스팅하우스를 만났습니다. 앞서 그해 7월 한국은 프랑스, 미국과 체코 원전을 수주하는 경쟁을 벌인 끝에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지만,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지식재산권 소송 중임을 이유로 체코 반독점당국에 이의를 제기했던 겁니다.
문제는 여기서 우리 측이 '한국형 노형의 기술자립 부정'을 인정, 웨스팅하우스와 협상력이 저하됐다는 점입니다. 황주호 전 한수원 사장은 올해 8월19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 출석해서도 "저는 애초부터 100% 우리 기술이라고 주장한 바 없다. 원자력계 일부에서 100% 우리 기술로 확보한 것처럼 착각할 수 있는 발언을 했지만, 상업적으로 들어가면 결국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구조"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2024년 9월 한전, 웨스팅하우스 '사전계약' 조건서 첫 확인
권향엽 민주당 의원이 한전으로부터 보고받은 자료를 보면, 한전은 지난해 9월3일 웨스팅하우스가 보낸 사전계약 조건서(term sheet)를 처음 확인했습니다. 거기엔 웨스팅하우스가 팀코리아를 신뢰할 수 없으므로, 타협 협정의 상업조건 이행을 강제할 대당 5억달러의 신용장 개설, 10억달러의 역무 제공 등 내용이 담겼습니다. 특히 역무 규모가 10억달러에 미달할 땐 부족분 금액의 50%를 현금으로 보상하라는 요구도 있었습니다. 한국이 6억달러의 역무만 제공하면 부족분인 4억달러의 절반(2억달러)을 현금으로 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조건서엔 상업조건 이행을 강제하는 '기한'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무기한'이었던 셈입니다.
2024년 10월 팀코리아, 미국서 웨스팅하우스와 조건 재협상
2024년 10월, 한전은 미국에서 웨스팅하우스와 만납니다. 그쪽이 제시한 내용은 무리하다고 판단, 재협상을 하게 됩니다. 먼저 신용장을 5억달러에서 4억달러로 줄이고, 협정 체결 10년 후 신용장 조항의 삭제 필요성을 재협의해야 한다는 일몰조항을 도입합니다. 불가항력 발생 땐 신용장 인출 예외조항도 추가했습니다.
또 아랍에미리트(UAE) 원전수출 때 설계·조달·시공(EPC) 역무가 6억3000만달러였던 걸 기준으로 들어, 원전 1기당 10억달러 역무 제공을 6억5000만달러로 낮췄습니다. 부족분의 50%를 현금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조건은 수용하지 않는 대신 기술료를 주기로 합의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2억달러의 기술료를 주장했지만, 한전은 EPC 계약금액은 1기당 (약 100억달러로 가정) 2% 미만이 적절하다고 보고, 기술료로 1억5000만달러를 제안했습니다. 그간 웨스팅하우스와 기술사용협정상 최저 기술사용료는 2.5%였기 때문에, 한전은 그러는 편이 합리적인 협상이었다고 판단한 걸로 보입니다. 이에 양측은 협상을 통해 양자 간 금액 중간인 1억7500만달러로 최종 합의했습니다. 그렇게 총 8억2500만달러 규모의 기술료와 역무를 제공하게 된 겁니다.
김동철 한국전력공사 사장이 지난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업무보고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2024년 11월, 한전 1차 이사회…"기간·비용 등 재협상 해야"
지난해 11월20일 한전 이사회가 열렸습니다. 당시 '해외 원전사업 협력 원칙'을 의결할 때, 이사들이 보고 받은 계약 조건서에도 '기한'은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이사회에선 "(무기한인) 기간 설정도 과하며, 신용장 개설 비용을 부담하는 점도 납득이 어렵다. 기간·비용 부분을 재협상해 주기 바란다. 협약에 유효기간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지난 8월 <뉴스토마토>가 만난 한 원전업계 관계자도 "원래는 웨스팅하우스와의 계약은 무기한이었는데, 한전 이사회 등에서 반대 의견이 나와 표면적으로라도 '50년 계약' 기한이 생겼다고 들었다"며 "(쌍방이 종료에 합의하지 않는 한 5년씩 자동 연장이면) 어쨌든 무기한이지만, 이사회 등 통해 '원안 과하다'는 내부 의견이 반영된 건데 원래 계약은 더 무도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2025년 1월, 한전 2차 이사회…"국민이 납득 가능할지 의문"
올해 1월14일 한전 이사회가 또 열렸습니다. '해외 원전사업 협력 원칙 후속 조치' 안건을 의결할 때는 계약서에 50년 기한이 추가됐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사회에서는 "지난번 협상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다"면서도 "과연 이번 협상의 결과를 국민이 납득 가능한 수준인지는 의문이다. 지불할 금액도 많고, 50년이라는 기간과 만료 후 계약 조건 과하다는 생각이라 재협상 통해 해결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후 2일 뒤인 1월16일, 한수원·한전과 웨스팅하우스는 지식재산권 분쟁 절차를 중단하고 합의문을 체결하게 됩니다.
윤석열씨가 지난해 9월20일(현지시간) 체코 플젠 산업단지 내 두산스코다파워 공장에서 황주호 전 한수원 사장 등 참석한 체코기업 터빈 두코바니 원전 공급 MOU에 임석해 있다. (사진=뉴시스)
권향엽 의원은 "국민이 모욕적으로 느끼는 '노예계약'보다 훨씬 후퇴한 초안이 어느 정도까지 굴욕적이었을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며 "정부가 웨스팅하우스와의 협상에서 얼마나 저자세로 임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성과주의에 눈이 멀어 국익을 흥정거리로 만든 윤석열정부의 조급증 앞에 한수원도 무릎을 꿇은 것"이라며 "황주호 전 사장은 산업부 조사 결과에 따라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근윤 기자 9nyo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