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민승 법률전문기자] 국가고시에서 채점 오류가 생겼을 때 피해자는 어떻게 구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최근 법원에서 국가고시의 채점 오류를 인정, 재채점 끝에 75명을 추가 합격시켰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이들에 대해서 배상할 책임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국가고시의 채점 오류 등은 국가로부터 위탁을 받아 시험을 주관하는 기관의 문제이지, 그로 인한 손해의 책임을 국가에 부담(전보)케 할 실질적인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모습.(사진=뉴스토마토)
최근 대법원은 세무사 시험에서 재채점을 거친 끝에 8개월이나 뒤늦게 합격한 세무사 중 일부가 한국산업인력공단(공단)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고들(공단과 대한민국)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이 사건은 20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앞서 공단은 대한민국으로부터 업무를 위탁받아 2021년 9월 세무사 자격시험 2차 시험을 시행했습니다. 공단은 그래 12월 706명에 대해 합격자 발표를 했고, 나머지 인원에 대해선 과목의 점수가 '기준 미달'(과락)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불합격을 통지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시험의 공정성에 관해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그러자 고용노동부는 감사를 통해 △출제위원 위촉 규정 미준수 △난이도 조정 과정 미흡 △동일한 답안에 대해 다른 점수 부여해 채점의 일관성 미흡 △채점 일관성 부족 문제에 대한 확인 및 검토 부재 등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감사원의 추가 감사에서는 △오해의 소지 있는 문제가 그대로 출제 △채점위원이 단독으로 채점 도중 채점 기준을 임의 변경 △실제 채점에 변경 기준과 다른 기준 적용 △표본 재채점 결과가 당초 채점 결과와 최대 5.5점 편차 발생 등의 문제가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공단은 감사에서 지적된 문제들을 근거로 대해 재채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2022년 8월 원고들을 포함한 75명의 추가 합격자가 발표했습니다. 이에 원고들은 '감사를 통해 공단의 2021년 12월 불합격 처분이 재량권을 일탈·남용한 위법임이 확인됐고, 불법행위에 해당하므로 원고들에 대해 손해배상책임을 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한민국 역시 국가배상책임을 지므로 피고들이 공동으로 원고들에게 1년간 세무사로서 얻을 수 있었던 일실 손해와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라며 소송을 제기한 겁니다.
이 사건의 1심 재판부는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인정되려면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때'라는 요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통 일반의 공무원을 표준으로 공무원이 객관적 주의의무를 소홀히 하고 그로 말미암아 객관적 정당성을 잃었다고 볼 수 있어야 국가배상법 제2조가 정한 국가배상책임이 성립된다는 겁니다.
재판부는 우선 공단이 시험 출제 과정에서 법령을 위반한 것으로 보기 어렵고, 출제위원의 재량권 일탈·남용이 인정되지 않아 출제 과정에서의 위법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채점 과정은 다소 적절하지 못한 점이 있고 공단의 업무 처리가 미흡했다고 인정했지만, 불합격 처분은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될 만큼 객관적 정당성을 잃은 위법한 행위가 아니라고 판단한 겁니다.
반면 2심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재판부는 세무사 시험 문제의 채점이 공단의 주의의무 위반으로 인해 일관성 없이 이뤄져 시험의 공정성을 침해하는 재량권의 일탈·남용이 있었고, 이에 근거한 불합격 처분 역시 객관적 정당성을 잃어 위법하다고 봤습니다. 논술형 시험이라도 채점위원의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채점이나 비일관된 채점까지 허용되는 것을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원채점자가 재량권을 일탈·남용했고 공단도 채점의 일관성을 검증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주의의무를 현저히 위반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2심이 국가배상책임의 성립 요건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음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러면서 2심 판결을 깨고 사건 서울고법으로 사건을 돌려보냈습니다.
대법원은 법령에 따라 국가가 시행하고 관리하는 시험에서 시험 문항의 출제나 채점 오류 등의 위법을 이유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하기 위한 판단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해당 시험이 응시자를 평가해 특정한 자격을 부여하는 사회적 제도로서 공익성을 가지는지 △시험 문항의 출제·채점 등을 위해 외부의 전문위원을 법령상 요건과 절차에 따라 적정하게 위촉했는지 △위촉된 위원들이 최대한 객관적 입장에서 해당 과목 시험 문항을 출제 및 채점했는지 △위원들 사이에 출제 및 채점 과정에 다른 의견은 없었는지 △시험 문항의 출제나 채점 오류가 사후적으로 정정되고 적절한 구제조치를 했는지 등 여러 사정을 종합했을 때 객관적 주의의무를 소홀히 해 그에 따른 행정처분이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하고, 이로 인한 손해의 전보책임을 국가에 부담시켜야 할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고 판단돼야 한다는 겁니다.
대법원은 우선 고용부 감사 결과는 1번 문제의 채점에서 응시자들 간의 동일한 답안 내용에 대해 다른 점수를 부여했다는 것일 뿐이고, 원고들의 답안에 최초 채점 당시에도 점수가 당연히 부여됐어야 하는지에 대한 심리가 없었다고 지적했습니다.
2번 문제에 대한 답안 내용과 그 답안에 어떤 채점 기준이 적용됐는지 확인되지 않았는데, 재채점 결과가 최초 채점 결과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최초 채점 과정이 객관적 정당성을 잃어 위법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채점위원이 채점 기준을 수정할 때 내부 지침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도 공단의 내부 지침에 불과하므로 이를 이유로 피고들이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라고 봤습니다.
공단은 합격자 통지 이후 불합격 처분을 받은 응시자들의 문제 제기에 따라 신속히 감사를 진행했습니다. 이어 재채점을 통해 추가로 합격을 시켰습니다. 이처럼 공단이 신속하게 구제 조치를 했다는 점도 피고들의 국가배상책임을 부정한 근거가 됐습니다.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에 오류가 있고 그로 인한 처분을 했더라도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더 구체적인 입증을 통해 객관적 정당성을 잃은 위법한 행위라는 점이 입증돼야 한다는 겁니다.
김민승 법률전문기자 lawyerms@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