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국제질서를 주도하면서 기본축으로 삼아왔던 '대서양 동맹'이 흔들리고 있다. 1941년 8월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전쟁 부인, 자결권, 자유무역, 집단 안보 등을 2차 대전 후 국제질서의 원칙으로 선언했다. 이는 2차 대전이 끝난 뒤 소련 억제와 유럽 안보가 핵심 목표인, 미국과 서유럽 간 '대서양 동맹'으로 제도화됐다.
그 군사 기구가 1949년에 4월에 출범한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로, 나토헌장 5조(집단방위)는 회원국 중 한 나라에 대한 무력 공격을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공동 대응하도록 해놨다.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자동개입' 조항이다. 현재 자동개입 조항이 있는 '동맹'은 사문화 논란이 있는 북·중 조약을 빼면 나토가 유일하다. 그 정도로 고강도 동맹이라는 것인데, 현재 나토 참여국은 미국, 캐나다와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32개국에 달한다.
첫 집권 때부터 나토를 비판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올해 2기 임기 시작 이후 그 강도를 높여왔다. 그는 나토의 근간인 나토 헌장 5조 준수도 약속하지 않고 있다. 지난 6월 나이 5조를 지키겠느냐는 질문에 "5조에는 여러 정의가 있다,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렸다"고 답했다. 폴란드와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이 나토에 가입한 것도, 그리고 스웨덴과 핀란드가 오랜 중립 정책을 깨고 나토에 가입한 것도,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애원하는 것도 바로 이 조항 때문인데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가운데) 미국 대통령이 6월24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 하우스텐보스 궁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 공식 만찬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미국, 유럽에 나토 재래식 방어 주도 요구하며 2027년 시한 제시"
지난 4일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국가안보전력'(NSS)은 유럽을 완전히 무시했다. 전체 33쪽 중 유럽에 할애한 분량은 2쪽 반에 불과했는데, 내용은 더 처참했다. 유럽의 '문명 소멸'(civilizational erasure)까지 거론하면서 이를 "현실적이고 더 뚜렷한 전망"이라고 했다. 또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초국가 기구들이 정적의 탄압을 위해 시민의 자유와 국가 주권을 훼손하고 표현의 자유를 검열하는 등 민주주의 주요 원리들을 짓밟고 있다"며 "미국 외교는 진정한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유럽 각국의 고유한 정체성과 역사를 당당히 기념하는 가치를 계속 옹호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애국적 유럽 정당들의 영향력 확대는 확실히 큰 낙관론을 불러일으킨다"면서 유럽에서 '극우'로 불리는 세력들에 대한 호감을 감추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볼 때, 늦어도 수십 년 안에 특정 나토 회원국들의 다수가 비유럽인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그들이 세계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나 미국과의 동맹을 나토 헌장에 서명한 국가들과 동일한 시각으로 바라볼지는 미지수"라며 인종, 종교 정체성까지 꺼냈다.
유럽은 이번 NSS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반면 러시아는 "여러모로 우리의 비전과 부합한다"고 반색했다. 미국의 대외 전략 최고 문서인 NSS가 우크라이나에서 사실상 미국과 맞서고 있는 러시아의 비전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현 상황과 관련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뉴스가 나왔다. 지난 5일 로이터통신은 미국이 2027년까지 나토의 재래식 방위 역량 대부분을 유럽이 직접 책임지라고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이 유럽에서 핵 억지력은 유지하겠지만, 일상적인 재래식 방위력은 이제부터 나토가 책임지라는 것이다.
기사는 미 국방부가 워싱턴D.C.에서 열린 유럽 대표단과의 회의에서 이 같은 방침을 전달했다면서 "유럽이 2027년 시한을 맞추지 못할 경우, 미국은 나토의 군사 계획·병력 조정 등 일부 방위 조율 체계에서 참여를 중단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1951년 창설 이래 나토군 총사령관은 예외 없이 전부 미군 대장이 맡아왔는데, 이제 미군의 나토 철수가 공공연하게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정부가 발표한 '2025 국가안보전략' 표지. (사진=백악관 홈페이지)
"NSS 초안, G7 대신 중·러 등 인구 1억 넘는 국가들과 'C5' 창설 제안"
NSS 공개 버전에 앞서 작성된 초안에는 유럽 관련해 더 충격적인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뉴스도 나왔다. 미국의 국방 전문 매체 <디펜스원>은 NSS 초안이 "유럽 국가들 중 트럼프 행정부와 성향이 비슷한 몇몇 국가들에 집중해야 한다"며 "EU에서 탈퇴시키는 것을 목표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폴란드 등과 더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고 9일 보도했다. 특정 국가들을 상대로 EU 탈퇴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또 기존의 G7이 아니라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일본 등 1억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강국들로 구성된 '핵심 5개국'(Core 5) 창설 제안도 있었다. 이 기준으로 하면 C5에는 유럽 국가들은 모두 배제된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백악관이 "NSS 비공개 버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했다"면서도 C5에 대해 "일부 관찰자들은 이것이 트럼프식 행보와 일맥상통한다고 지적했다"고 썼다. 실제 트럼프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14년 G8 정상회담에서 러시아를 제외한 것을 "매우 큰 실수"라고 비판했고, 중국을 포함해 'G9'을 구성하고 싶다는 말도 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 하원에는 '미국 나토 탈퇴' 법안도 발의됐다. 공화당 토머스 매시 하원의원이 "나토는 냉전시대의 유물로, 우리는 나토에서 탈퇴하고 그 재원을 사회주의국가들이 아닌 우리나라의 방어에 사용해야 한다"며 지난 9일 이 법안을 제출했다.
미국이 나토에서 발을 빼는 듯한 모습이 본격화하는 반면, NSS도 최우선이라고 한 '서반구 중시'는 구체화하고 있다. 지난 5일 미 육군은 육군전력사령부와 중·남미와 카리브해 전체를 관할하는 남부사령부, 미국 본토 방위와 민간 지원 임무를 맡는 북부사령부를 통합한 서반구사령부(USAWHC)를 출범시켰다. 2026년 여름까지 서반구 전체에 대한 미 육군의 완전 작전 능력을 갖추겠다는 목표다.
"우리 서반구의 긴급한 위협, 특히 본 전략에서 명시한 임무에 대응하기 위해 전 세계 주둔 미군을 재조정하고 최근 수십 년 또는 수년간 미국 국가안보에 대한 상대적 중요성이 감소한 전장으로부터 철수하겠다"는 NSS 방침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황방열 통일외교 전문위원 bangyeoulhw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