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혜정 기자] 미국이 중국의 ‘인공지능(AI) 굴기’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수출을 옥죄면서 반도체가 미·중 관세전쟁의 핵심 전장으로 떠올랐습니다. 미 정부가 엔비디아·AMD에 이어 인텔 제품의 중국 수출에 대해서도 규제에 나섰고, 중국은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희토류 수출 제한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반도체 품목별 관세가 예정된 가운데 미중 간의 기술 패권 경쟁까지 격화되면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은 연쇄 리스크에 직면한 형국입니다.
인텔이 미 정부로부터 중국으로 수출하는 인공지능(AI) 반도체에 대한 규제를 받게 됐다. IT 전시장에 설치된 인텔 로고. (사진=연합뉴스)
16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인텔은 중국 고객에게 인공지능(AI) 프로세서를 판매하려면 미국 정부의 라이선스(허가증)가 필요하다고 통보했습니다. 지난주 인텔은 전세계 고객들에게 자사의 칩이 초당 1400기가바이트(GB) 이상의 총 DRAM 대역폭, 초당 1100GB 이상의 입출력(I/O) 대역폭 또는 두 가지를 합쳐 초당 1700GB 이상인 경우 중국 수출에 대한 라이선스가 필요하다고 알렸습니다. 해당 요건은 인텔의 AI 칩 ‘가우디 시리즈’와 엔비디아의 H20(중국 수출용 AI 반도체)을 훨씬 뛰어넘는 기준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엔비디아의 최대 경쟁사로 꼽히는 AMD 역시 통제를 받으며 대중국 수출 규제가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이날 AMD는 미국 정부의 수출 규제로 8억(약 1조1330억원) 달러의 손실을 보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AMD는 중국에 저사양 MI308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AMD는 “정부의 수출 허가를 받지 못할 경우, 회사는 약 8억달러의 재고 구매 약정·관련 준비금을 부담해야 한다”며 “이미 정부에 수출 신청을 해놓은 상황이지만, 허가가 나올지는 미지수”라고 밝혔습니다.
전날 엔비디아는 “지난 9일 미국 정부로부터 H20이 중국 수출에 사전 허가 의무가 부과됐다는 통보를 받았으며, 4월14일부터 이 조치가 ‘무기한 적용’된다는 추가 안내를 받았다”고 공시를 통해 밝혔습니다. 엔비디아는 이로 인해 55억달러(약 7조8000억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미·중 무역 갈등이 격화되면서 국내 반도체업계가 연쇄 리스크에 시달리고 있다. 서울 서초구 삼성그룹 사옥과 경기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 (사진=뉴시스)
미 정부가 이처럼 대중 수출 규제에 나선 이유는 AI 칩이 중국 내 슈퍼컴퓨터에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이에 미 반도체 회사들은 규제보다 낮은 저사양 AI 칩을 중국에 수출해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1월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H20 등 저사양 칩을 활용하여 고성능 AI 모델을 선보이자 수출 규제 강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번에 실제 조치로 이뤄졌습니다.
앞서 중국은 반도체를 비롯한 수많은 전자제품 핵심 원료인 희토류 수출 제한으로 맞대응하고 있습니다. 이달 초 중국은 방위, 에너지, 자동차, 반도체 등에 사용되는 7가지 희토류와 자석에 대한 수출 제한을 시작하며 미국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미·중 무역 갈등이 격화되면서 반도체업계는 연쇄 리스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고종완 실장은 “반도체는 부품 산업이기 때문에 시장 불확실성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며 “반도체 시장이 작년 하반기에 안 좋았다가 올해 초 반등하고 있는 와중이었는데 통상 변화 정책 때문에 불확실성이 커졌다”고 했습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미 기업들은 직접적인 피해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고, 해당 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있는 국내 기업들에게는 간접적으로 부정적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이어 “국내 기업들은 중국 아닌 다른 지역으로 생산지를 다변화하는 등 미국의 압박을 피해 갈 것으로 예상된다”며 “국내 피해 규모는 불안 요소가 일시적으로 더 가중되는 수준일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박혜정 기자 sunright@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