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영국이 추앙하는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3막 1장에 나오는 데, 햄릿과 오필리어가 만나기 직전에 햄릿이 자신의 고뇌를 토로하는 장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는 시나리오에 대해 소개할 때 ‘독백’의 대명사로 제시합니다. 요즘 수험생들은 참고하지 않는 듯 하던데, 1980년대 고교시절을 보낸 고교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봤을 성문기본영어나 성문종합영의 ‘To부정사’ 편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예시문이었습니다.
국어로 해석하자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알아들어야 하는 문구였습니다.
저 문장이 왜 ‘죽느냐, 사느냐’로 해석되는 지 가르쳐 준 선생은 없었습니다. 질문을 마음껏 하라고 해 놓고, 궁금증에 물어보면 갑자기 시계를 풀고 주먹을 풀스윙 날리던 선생들이 줄을 섰던 시절, 그나마 친절했던 영어 선생이 한참을 설명했지만 의문은 더욱 쌓여만 갔습니다.
해석은 둘째 치고, 그저 시험에 나오는 영문법에 집중할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To부정사는 뒤에 동사원형을 수반한다는 것, To부정사의 부정은 앞에 not으로 부인한다는 것, be동사의 원래 뜻은 ‘있다’ ‘존재하다’로 해석되는데, 그냥 저 문장은 ‘그렇게 외워라’고 답을 듣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럼 해석을 ‘있거나, 없거나, 그것이 의문이다’로 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더 물어보다간 ‘별 것 아닌 것’ 갖고 교사의 성질을 건드릴까봐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문이 풀린 것은 대학에 간 뒤 였습니다. 1학년 때인가, 2학년때인가 가물거리긴 한데, 다른 과 수업을 이수해도 학점으로 인정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수강신청을 인터넷으로 하겠지만, 그 때만 해도 두꺼운 책자에 빼곡히 적힌 글자를 뒤져 가며 수강신청서에 적어 내던 시절인데 영문과 수업 중에 ‘셰익스피어의 이해’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호기심에 신청하고, 다른 과에 깍두기처럼 끼어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교수가 셰익스피어 전공자였는지 저 문구를 딱 칠판에 쓰고, 열정적으로 설명하면서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아, 듣고 보니 저게 간단치 않은 문구였던 겁니다. ‘사느냐, 죽느냐’로 쓸려면 당초 'Dead or Alive'같은 직설적인 표현을 쓰면 되는데, 굳이 'to be, or not to be'로 나타낸 것은 철학적 의미까지 담아냈던 겁니다.
굳이 원문대로 표현하자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인데, 전체 대사를 보면 이후 계속 죽음에 대한 고민과 번뇌가 있고, 죽음 이후에는 삶은 꺼져버린 촛불과 같이 영원히 사라져 버리니 ‘존재하느냐 마느냐’를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에 맞물리게 ‘be동사’를 사용한 겁니다.
영어는 자아가 강한 언어인데, be 동사의 경우 주격에 따라 변화합니다. 현재형을 기준으로 나를 지칭할땐 ‘am’, 너를 일컬을 땐 ‘are’, 제 3자인 그를 표현할땐 ‘is’로 모습을 바꿉니다.
과거형도 격에 맞게 바뀌고, 시점이 중시되는 과거분사는 ‘been’이라는 하나로 쓰여 집니다.
단어 하나에 스민 철학까지 강의를 듣고 나니 소소한 인생의 깨달음이랄까. 뒤통수를 번쩍 치는 기분좋은 느낌에 감탄을 내뱉었던 기억납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6월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제21대 대통령 취임 선서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존재' 의미와 대통령
‘be동사’를 굳이 꺼내온 것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인 전직 대통령 부부의 현재 모습 때문입니다. ‘be’의 원 뜻이 ‘존재하다’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 나라의 수장이라는 ‘존재’에 맞게 주어진 사명과 이유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습니다.
윤석열씨가 탄핵 이후 뱉었다는 ‘대통령, 3년하나 5년하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 탄식이 절로 새어나왔습니다. 처음부터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대한 존재의식을 갖추지 않고, 그저 대장놀이를 위한 놀이터로 삼았다는 것을 자인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윤씨 탄핵과 파면 이후 반년이 지나고, 이제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To be’의 의미를 잘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월을 두고 살아가야 할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오승주 공동체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