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오승훈 산업1부장] 지난달 만난 한 대기업 임원은 “요즘 기업 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푸념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고율 관세와 공급망 재편, 경기 불황까지 겹쳐 수출길이 막히고 내수도 침체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조금만 더 지원해주면 견딜 수 있는데, 규제는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는 말이 뒤따랐다. 그가 말하는 ‘지원’이란 세금 감면과 금융 지원이었고, ‘규제’란 안전, 환경, 고용 관련 의무였다.
기업 입장에서 그 심정을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글로벌 무한경쟁의 파고 속에서 정부의 역할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실제로 팬데믹과 미중 갈등 국면에서 미국과 유럽도 자국 기업을 지키기 위해 막대한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쏟아붓고 있다. 문제는 ‘지원은 해주되 간섭하지 말라’는 기업의 태도가 과연 정당한지에 있다.
지난해 한국 정부가 기업 지원에 투입한 예산은 100조원을 훌쩍 넘는다. 정책금융, 세제 감면, 각종 보조금 등이 그 이름만 다를 뿐, 모두 국민 세금으로 조성된 재원이다. 공적 자금이 투입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시장 거래’가 아니라 사회적 계약이 된다. 사회적 계약에는 책임이 따른다. 고용을 유지하고, 환경을 보호하고, 공정한 거래를 하는 것, 즉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은 국민의 재정적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최소한의 증거다.
현실은 어떤가. 한국 산업계의 많은 기업들은 정부의 재정 지원은 기꺼이 받으면서도, 노동권 강화나 환경 규제를 ‘기업 옥죄기’라며 무조건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지원하되 규제하지 말라’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다. 특히 탄소국경세와 ESG 의무가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는 시점에, 규제 회피가 과연 장기적으로 기업을 지켜줄지도 의문이다.
정부 역시 산업계의 어려움을 돕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원의 조건은 분명해야 한다. 고용 유지, 기술개발 투자, 환경 규제 준수, 불공정 거래 개선 등을 협약으로 명문화해 공적 자금의 효과를 사회 전체가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국민 세금’의 주인인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
지금의 경제 위기는 단순히 돈을 푸는 것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기업과 정부 모두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시장의 자유를 존중하되, 자유의 대가를 치를 준비도 해야 한다. 지원과 규제는 적이 아니다. 둘은 함께 갈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경제의 길이 열린다.
정부가 묻고, 기업이 답해야 할 질문은 이 한마디다. “사회가 기업을 지키는 만큼, 기업도 사회를 지킬 준비가 돼 있는가?”
오승훈 산업1부장 grantorin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