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배덕훈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관세 협상에서의 한국의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액을 두고 먼저 돈부터 내놓으라는 식으로 말하자, 재계는 미국의 요구 너머 한미 상호관세 협상 이행 자체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에 휩싸였습니다. 정부와 원팀으로 관세 협상을 지원하고 합의의 원만한 이행을 기다려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막무가내식 횡포가 거듭되자 협상 결과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도 나옵니다. 특히 추가 및 현금 투자 확대를 압박하는 미국을 정부가 설득해낼 수 있을지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재계에는 깊은 불안감이 퍼지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중국 동영상 플랫폼 틱톡 합의와 관련한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한미 무역 합의에 따라 한국이 미국에 투자할 3500억달러를 언급하면서 “이것은 선불(up front)”이라고 했습니다. 트럼프의 발언은 현재 협상의 최대 쟁점인 대미 투자를 놓고 양국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미 양국은 지난 7월30일 무역 협상에서 미국이 한국에 부과하는 상호관세와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고 그 대신 한국이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등을 시행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당시 재계에서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등 총수들이 깜짝 등판하며 협상 타결을 측면 지원했습니다. 특히 재계는 관세 협상 타결 이후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의 경제사절단으로 참여해 1500억달러(약 208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며 정부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미 투자 구성·이행 방식을 두고 양국의 이견이 커 무역 합의에 따른 관세 인하 조치는 아직까지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투자 금액 대부분을 대출·보증으로 하고 직접투자는 일부일 뿐이라는 입장인 데 반해, 미국은 앞서 일본과 합의한 것처럼 직접적 투자 방식으로 현금을 받고 수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가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터져 나온 트럼프 대통령의 ‘선불’ 발언은 한국에 대한 관세 인하의 조건이 ‘선입금’임을 강조하는 사실상의 협박인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 유럽이 한국보다 먼저 자동차 관세 인하를 적용받는 등 협상 지연에 따른 기업들의 부담도 현실화하는 모습입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현금 선투자 외에도 대미 투자액을 더욱 늘리라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5일(현지시간)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한국 측에 대미 투자 금액을 합의에 따른 3500억달러에서 더늘리라고 압박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WSJ는 미국 정부 관계자 등을 인용해 “한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대출보다는 현금으로 더 많은 자금을 지원받기를 원한다고 비공식적으로 전달했다”고 덧붙였습니다.
경기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 자동차 전용 부두에 수출용 차량이 세워져 있다. (사진=뉴시스)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끝내 물리치지 못할 경우, 당장 정부나 기업이 추가 부담해야 할 투자액은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한국 경제가 이를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당초 정부는 무역 합의 당시 주요 국내 기업들의 대미 그린필드 투자(생산시설 직접투자) 계획을 묶어 1000억달러+알파(α) 수준의 대미 투자 계획안을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이 ‘현금 투자 확대’ 요구를 빌미로 관세 인하를 지연시키거나 기존 합의를 깨는 등 파국으로 치달을 경우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후속 협상을 긴밀히 예의 주시하고 있던 재계는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재계 관계자는 “관세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어 협상이 하루빨리 마무리돼야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들쑥날쑥한 발언으로 사업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기업의 목줄을 쥐고 있는 풍전등화의 상황으로 기업 차원에서의 대미 추가 투자도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는 “관세 협상과 관련해서 기업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기에 답답한 상황”이라며 “대내외 불확실성이 여전한 가운데 현실적으로 예정된 투자 집행 외에 추가로 투자를 할 여력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트럼프의 ‘선불’ 발언이 협상용 레토릭(수사)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평행선을 달리는 관세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엄포로 이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입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의 ‘선불’ 발언은 전형적인 인기 영합적인 언어 습관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며 “선불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공사 대금을 납부하라는 듯 보이지만, 실제 무역 협상에서는 그렇게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맥락은 유의 깊게 살펴야 하겠지만,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서울 도심 속 마천루. (사진=뉴시스)
배덕훈 기자 paladin70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