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개 언어로 정보를 제공하는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의 표제어(entry)는 영어판의 10분의 1, 일본어판의 절반에 불과하다.
[뉴스토마토 서경주 객원기자] 위키피디아(Wikipedia)는 21세기 지식 생태계를 상징하는 이름 중 하나입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자유 백과사전(free and open-content encyclopedia)’이라는 철학으로 2001년 설립된 위키피디아는, 특정 기관이나 출판사의 통제 없이 전 세계 이용자들이 함께 작성하고 검증하는 집단지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 위키피디아가 최근 몇 년 사이 정치적 편향성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위키피디아 공동 창립자가 보수 진영의 반(反)위키피디아 운동에 불을 지피고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개방형 편집의 한계와 ‘중립성’의 위기
기사의 주인공은 위키피디아 공동 창립자 중 한 사람인 래리 생어(Larry Sanger)입니다. 오랫동안 위키피디아의 중립성에 의문을 제기해온 생어는 지난 9월29일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95개조 논제를 연상시키는 ‘9개 명제(Nine Theses)’를 발표하고 위키피디아가 더 이상 중립적이지 않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소수 엘리트 편집자 집단이 ‘합의’라는 이름으로 여론을 통제하고, 보수적 시각이나 비주류 매체를 배제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생어는 위키피디아가 다양한 관점의 병존, 투명한 운영, 그리고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복원해야만 자유 백과사전이라는 본분을 되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위키피디아는 ‘누구나 편집할 수 있는’ 개방성을 핵심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개방성이 정치적 논쟁이 격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자원 편집자 중 일부는 기사 편집을 통해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서술 방향을 바꾸거나, 특정 언론 보도만을 근거로 인용하는 등 ‘의도된 정보 편향’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2024년 미국 대선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에 대한 위키피디아의 기술 내용은 하루에도 수십 차례 수정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신뢰할 수 없는 출처나 정치 캠프의 홍보 자료를 근거로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보수 진영의 지원과 일론 머스크의 도전
이런 가운데 생어의 9개 명제가 발표된 다음 날, 미국 우파의 대변인 격인 폭스뉴스의 진행자 터커 칼슨(Tucker Carlson)은 생어를 인터뷰하고 X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래리 생어는 위키피디아를 전 세계 지식의 편견 없는 저장소로 구축했지만, 활동가들과 정보기관들이 위키피디아를 인류 역사상 가장 포괄적인 선전 도구로 만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보다 더 부패한 것은 없다.”
일론 머스크도 ‘위키피디아 공동창립자의 좋은 제안’이라는 캡션을 달아 생어의 9개 명제를 X에 공유하고 자신의 인공지능 시스템인 그록(Grok)을 기반으로, 새로운 오픈 콘텐츠형 백과사전인 그로키피디아(Grokipedia)를 만들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그로키피디아가 “사실, 부분적 사실, 거짓, 그리고 누락된 부분”을 가려내 거짓은 삭제하고, 반쪽짜리 진실을 바로잡고, 누락된 맥락은 추가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2023년, 위키피디아가 이름을 디키피디아(Dickipedia)로 바꾸면 10억달러를 기부하겠다는 조롱성 글을 포스팅한 바 있습니다. 물론 위키피디아는 측은 이런 제안을 즉각 거부했습니다.
머스크는 최근 위키피디아의 자유주의적 편향이 그의 Grok 챗봇이 제공하는 답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AI가 학습하는 데이터가 편향되어 있다면, 결국 AI의 판단도 편향된다”며 “그로키피디아는 AI가 공정한 사실을 학습할 수 있도록 설계된 새로운 오픈소스 지식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머스크 역시 명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만드는 플랫폼이 정말 ‘중립적’일지 의문이라고 지적하며 새로운 백과사전이 ‘또 다른 편향’을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위키피디아의 반응
위키백과 공동 창립자이자 현재 위키미디어 재단 이사인 지미 웨일스(Jimmy Wales)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생어의 9개 명제를 훑어보았으며 위키피디아의 개선 방안에 대한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항상 열려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생어의 제안 중 하나인, 대중이 기사의 질을 평가하도록 하는 방안은 더 깊이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고 했지만, 위키피디아가 모든 출처를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생각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일축했습니다. 아울러 “중립성은 여전히 위키피디아의 핵심 정책이며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고 강조했습니다.
현재 위키미디어 재단의 CEO인 마리야나 이스칸더(Maryana Iskander)는 위키피디아의 편집 시스템이 중립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위키피디아는 설득이 아니라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편향된 내용이 있을 경우, “시스템이 스스로 수정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스칸더는 또 위키백과가 중국, 러시아, 터키 등 여러 국가에서 차단된 사례를 언급하고, 미국 내에서의 정치적 압력이 ‘전례 없는 일’이라며 위키피디아의 정치적 중립성을 문제 삼는 사람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지식 플랫폼과 권력, 그리고 사회적 책임
이번 논란은 ‘위키피디아가 편향되어 있는가’라는 단순한 물음을 넘어, 지식을 구성하는 사실과 진실이 어떻게 정의되며, 그 과정에 권력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되묻게 합니다.
위키피디아에 기술된 지식은 현대인의 ‘상식’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AI 챗봇과 검색엔진의 대부분이 위키피디아 데이터를 학습 자료로 활용합니다. 그렇다면 위키피디아의 편향 문제는 단순한 내부 정책의 차원을 넘어, ‘지식 인프라의 민주성’이라는 더 큰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지식 플랫폼이 민주적이려면 다양한 시각이 공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키피디아는 이미 ‘유일하고 압도적인 공적 백과사전’이 되었습니다. 경쟁이 사라진 독점적 구조는 언제든 편향 논란을 촉발할 수 있습니다.
래리 생어(Larry Sanger)는 위키피디아의 영향력 있는 편집자들이 GASP, 즉 세계주의적(Globalist), 학문 중심적(Academic), 세속적(Scular), 진보적(Progressive) 세계관을 내세우는 경향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사진=Wikipedia)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