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1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주식시장 불공정거래 근절을 위한 현장 간담회에서 참석자의 발언을 듣고 있다. (사진=뉴시스)
예외는 없었다. 정권마다 큰소리쳤다. 모든 대통령이 그랬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부터 국내총생산(GDP)까지. 구체적 목표를 수치화했다. 2008년과 2013년 각각 집권한 이명박(MB)의 '7·4·7'(7% 성장·국민소득 4만달러·7대 경제 강국)과 박근혜의 '4·7·4'(4%대 잠재성장률·고용률 70%·국민소득 4만달러) 등이 대표적. 각 부처는 이를 '제1 강령'으로 삼았다. 부처 공무원들은 군사작전 하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어느 늘공(직업공무원)이 헌법 위 '대통령 공약'을 무시하랴.
그야말로 허언. 지난해 1인당 GNI는 3만6624달러(한국은행의 2024년 4분기 및 연간 국민소득 통계). 1인당 국민소득이 사상 첫 5000만원을 넘은 것도 이때가 처음. 1인당 GNI 4만달러 진입 시점은 빨라야 오는 2027년. 7·4·7와 4·7·4 등은 5년짜리 권력자의 달콤한 정치적 수사였다.
진보든 보수든 못 끊는 '성장 사랑'
모든 정권의 강박증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그놈의 성장. 저성장은 한국 경제의 고정변수다. 더는 거부할 수 없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에선 민관정이 총력전을 펼쳐도 과거처럼 몸집을 불릴 수 없다. 어린아이가 많이 먹으면 키가 크지만, 성장판이 닫힌 어른은 살만 찌는 것과 같은 이치. 되레 부작용만 온다는 뜻. 성장판이 닫힌 한국 경제에 '성장 모델'만을 들이미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사기다.
강박증에 시달리는 것은 이재명정부도 마찬가지.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3·4·5'(3% 잠재성장률·4대 수출 강국·국민소득 5만달러) 공약을 내걸었다. 코스피지수 5000은 옵션. 에헤야 디야, 과거 보수 정권을 망친 고장 난 레코드 아닌가. 박정희 군부독재부터 반세기 넘게 한국 사회를 지배한 '양적 성장 연대'의 업그레이드판.
이 대통령은 지난 11일 취임 후 처음으로 한국거래소를 찾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은 주식으로, 증권시장이 경제 성장의 선순환"이라며 "주식시장을 부동산에 버금가는 대체 수단으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특히 "우리가 배당을 중국보다 안 하는 나라다. 다른 나라는 우량주를 사서 중간배당도 받아 생활비도 하는 등 경제 선순환에도 도움이 된다"라며 "배당을 촉진하기 위한 세제 개편이나 제도 개편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재명정부에 기대하는 건 코스피지수니, 성장률이니, 고용률이니 하는 '거시지표의 판타지'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당면한 근본적 문제 해결. 그 이름은 '세습 자본주의' 타파. 프랑스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세습 자본주의를 꼽았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촉발한 '1대 99' 사회에 대한 고발. 정권교체 하나로 타파는 못 하니 행동으로 맞설 수 있는 판을 만들라는 게 또 다른 국민의 명령.
강훈식 비서실장이 6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조직개편안 및 1차 인선 발표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문진영 사회수석비서관, 김용범 정책실장, 강 비서실장, 하준경 경제성장수석, 류덕현 재정기획보좌관. (사진=뉴시스)
월가 점령은커녕…상속자 자본주의만
현실은 딴판. 이재명정부 초기 국정 기조는 첫째도 둘째도 '성장' 드라이브. 대선 후보 땐 '흑묘백묘론'을 앞세운 우클릭. 상속세 감면 등 부자 감세가 대표적. 지난 2023년 기준, 상속세 배우자 공제가 적용된 피상속인은 고작 1만115명. 이마저도 문재인정부의 부동산값 폭등으로 늘어난 수치다. 같은 해 사망자 수는 35만2511명. 고작 2.8%만이 피상속인.
이 중 56.4%인 1만115명이 5억원 이하. 5억원 초과~30억원 이하의 피상속인은 390명에 불과(이상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실 분석). 이쯤 되면 상속세 감면은 상위 3%를 위한 부자 감세. 응당 내야 할 세금을 안 내는 것과 경제 선순환은 어떤 관계인가. 상위 3%인 금수저의 가처분소득 증가가 경제 선순환을 이끌 것인가. 상상력을 발휘해도 동의하기 어렵다.
집권 초 뭐라도 해야 하니 고작 꺼낸 게 추가경정예산 편성. 핵심은 소비쿠폰 형식의 전 국민 25만원. 하지만 어쩌나. 대가성 없는 이전지출 확대의 재정승수 효과는 크지 않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문재인정부 때인 2020년 전 국민 25만원 지급 당시, 투입 예산(14조3000억원) 대비 소비 증가 효과는 26.2∼36.1%. 현금성 지원의 신규 소비 창출 한계다. 되레 인플레이션 자극은 덤.
'소년공 대통령'에게 원하는 건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7년 전(2018년 7월 2일, 현지시간) '고장난 엘리베이터? 어떻게 사회 이동을 촉진할 것인가' 보고서를 통해 소득 하위 10%(월평균 84만1203원) 가구의 평균 소득(476만3000원) 이동 기간이 '150년'에 달한다고 했다. 시사점은 세습 자본주의의 위험성. 이재명정부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나.
최신형 정치정책부장